선산임씨씨족사 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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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임씨전국종친회회장 임용원(林容源)
사람은 본성의 내면에 조상의 뿌리와 씨족의 인물사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입니다. 족보가 있다하나 책의 무게나 부피 때문에라도 접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그 편제와 내용 또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다보니 마음속 궁금증을 풀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이 사실일 것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어려서 선산임씨가 어떤 씨족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소박한 욕구를 풀어줄 씨족사 안내책자를 갈망하였음은 비단 저 같은 사람만의 바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소망의 일부라도 충족시켜드리고자 이 책자를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당초 책의 원고는 임종필(林鍾弼) 종인께서 다년간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초고를 제가 보완한 논고문이었는데, 마침 원고 중 임백령(林百齡)공편을 보신 충청종친회에서 이 논고문을 책으로 발간하자고 제의하여 2014년 11월 발간, 충청종친들께 배부한바 있는 같은 표제의 책이 그 저본입니다. 주저자 종필씨께서는 직장생활 은퇴 후 종중 일에 적극 참여하시면서 우리 선산임씨 씨족사 탐구에 진력하신바 있습니다. 특히『을해보』(1995) 수보(修譜) 때 부유사(副有司)로 참여 상계종사(宗史)를 더욱 깊이 탐구하시어 5차『병진보』(1916)·6차『병신보』(1956)·7차『정사보』(1977)의 상계가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상계를 최초보인『병술보』(1766)로 환원하여 우리 선산 임씨의 정체성을 바로 잡은 바 있습니다.
한편 종필씨께서는 우리 선림(善林)의 자랑스러운 선조 희재(希齋) 임백령공 사적에 특히 천착하시었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희재공은 조선 중종·명종 때 활약한 고위문반으로서, 명종 때 정1품 숭선부원군에 승차하시고 사후「충헌(忠憲)」의 시호까지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에 의해「을사사화」의 주역으로 꼽히시어 공의 사후 30여년이나 지난 시점에 공의 훈작을 위훈(僞勳)으로 몰아 삭탈시키는 오욕을 입으심에 종문 내에서 조차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설사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다 할지라도 종문 내에서 조차 공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 비분(悲憤)한 마음이 일어, 적어도 종문의 입장에서라도 신원(伸寃)을 해드려야겠다 마음먹고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사료를 두루 탐구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사적의 진면목을 다시 일으키고 역사기록의 재평가를 통하여 공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진력하신 것입니다.
더불어「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칭송 받는 대문장가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공, 진남제를 구축하시고 광주목사 등 벼슬도 하신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도 함께 그 사적을 깊이 탐구하여 초고를 쓰셨습니다. 종필씨께서는 이렇게 선산임씨의 상계종사는 물론 선산임씨를 중흥시킨 세 분 령(齡)자 조(祖)와 다른 씨족사에 대해서도 폭넓고 깊이 있게 탐구하신바, 중앙일보 연재「성씨의 고향」시리즈나『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 관향편의「선산임씨」편을 써 대외적으로도 우리 선림(善林)을 알리는데 애쓰신 바 있습니다. 한편, 저도 직장은퇴 후 종필씨의 도움을 받아 저의 고향(경남 고성) 입향조 능복(能福)(구령공의 손자, 완의 자)분의 사적 탐구로 부터 시작하여 시조·중시조에 이르기까지 선림 상계종사와 그 역사적 사실관계 탐구에 나름대로 진력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탐구 노력의 결과, 우리 선림의 시조 임양저(林良貯)공의 오리지널 설화기사를 발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관계와 대조 조명해보니 우리의 득성·득관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함을 밝혀내어 우리씨족의 정체성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데 우리씨족은 선산 김씨와 더불어 선산의 유력 성씨로서 호장(戶長) 종문임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 임씨 상계에까지 탐구범위를 넓혀 각 관향 초기족보를 두루 살피고 여러 참고문헌과 함께 제법 깊이 있는 고구(考究)를 수행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탐구노력은『선산임씨상계대고』·『임씨상계대고(1)(2)』의 논고집으로 편철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종필씨와 저의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 집약된 논고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덧붙일 바는, 근자에 어느 종인이『을해보』(1995) 상계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선림이 평택임씨의 파계(派系)가 된다고 하는 해묵은 주장을 다시 제기하는 일이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병진보』(1916)·『병신보』(1956)·『정사보』(1977)의 상계기록을 심층 분석하여 이 3족보 상계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더욱 소상히 밝히고 위와 같은 주장이 더는 제기되지 않도록 그 논리를 확실히 한바 있으며, 이 책에는 그와 관련한 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책「별첨논고」편 참조, 자세한 내용은 저의 논고집『선산임씨상계대고』·『임씨상계대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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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문은 중시조 만(蔓)자 조(祖)께서 고려 말~조선조 초 영암으로 입향하시어 둥지를 트신 후 7세 즈음에 이르러 특히억령·백령·구령의 걸출하신 3령조(三齡祖)께서 당대의 큰 인물로 활약 우리 종문은 명실상부하게 호남의 명문 망족(望族) 반열에 오르게 되고 후손들은 더욱 족세를 넓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3령조분의 사적을 중심으로 한 기왕의 충청종친회 발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일부 착오를 바로잡고, 상계종사를 보완하면서 족보의 행장·유사·묘지명 등을 두루 참조 중세씨족사에 기억되었으면 하는 여러 선조 분들의 행적도 반영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 선림의 종사탐구에 매진하셨던 종필씨께서 2014년 논고서 발간 후 평생 반려이신 사모님께서 타계하시자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셔서 불운하게도 이승을 떠나시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종필씨께서는 평소 임백령공의 사적과 관련하여 종중에서 전해내려 오는 자학적인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면서 공의 행적에 대하여『조선왕조실록』을 엄밀히 숙독하면 결코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컨대『명종실록』은 선조임금 때 신진사류들이 실권을 가졌을 때 쓰인 기록이고, 그 신진사류들이 선조3년(1570) 4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 끈질기게 선조를 괴롭혀 훈작 후 장장 32년(명종즉위년~선조10), 선조 등극 후 10년 만에야 삭훈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심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한국사』를 보아도, 신진사류 자신들의 정치활동 정당성을 확보하고 안정을 보장 받는다는 현실적인 면에서 이를 밀어 붙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하다가 선조6년(1573) 비로소 정권을 확보하고 선조10년(1577) 인종비 인성왕후가 위독할 때 대비의 지원(至願)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마지못해 내린 조치라 풀이하고 있는 사안입니다.
이 책의 첫 주안점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백령공의 사적을 다른 각도에서 심층 분석하여 결코 우리 후인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자학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종필씨께서 지적하신대로「을사사화」의 주역은 문정왕후이며 공범이 윤원형입니다.
역사적 사실관계를 엄격히 고구(考究)해 보면, 을사사화(1545.8)에서의 임백령 공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부분이 엄연히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나 애석한 일은 공께서 명종즉위사은사로 북경을 다녀오다 중국 땅 영평부에서 급서(急逝)하시지만(1546. 6) 않았어도 그 후유증이 다르게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음은 능히 상상이 가능한 일입니다.
훌륭한 선조를 둔 후손으로서 선조의 자랑스러운진면목을 밝히는 일은 후손의 마땅한 임무일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필씨께서는『왕조실록』을 읽고 또 읽어 공의 참된 사적을 밝혀내 후세에 씌워진 오명을 걷어내고자 노력하신 것 입니다. 이에 저도 미력하나마 역사서를 읽고 원고를 힘껏 보완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언급 드린바와 같이, 상계종사는 종사대로『병진보』~『 정사보』에서 훼손된 선림 정체성의 정설을 알리는 과제가 시급하고 긴요하며, 더불어 임백령공 관련 사적의 재조명 결과를 홍보하여 우리 선림의 자긍심을 높이는 작업도 꼭 필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에 마침 제가 전국종친회 회장의 중책을 맡음을(2018.4) 계기로 우리 씨족사의 진면목을 알릴 책자 발간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일면 미흡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나, 제한된 지면에 두루 다 카버하지 못함을 해량하여 주시고, 앞으로 더욱 우리 종사와 관련 중요한 일화나 종문을 빛낸 사적을 발굴, 우리 종문의 자긍심을 높이는 작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합니다.
선산임씨전국종친회회장 임용원(林容源)
사람은 본성의 내면에 조상의 뿌리와 씨족의 인물사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입니다. 족보가 있다하나 책의 무게나 부피 때문에라도 접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그 편제와 내용 또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다보니 마음속 궁금증을 풀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이 사실일 것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어려서 선산임씨가 어떤 씨족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소박한 욕구를 풀어줄 씨족사 안내책자를 갈망하였음은 비단 저 같은 사람만의 바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소망의 일부라도 충족시켜드리고자 이 책자를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당초 책의 원고는 임종필(林鍾弼) 종인께서 다년간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초고를 제가 보완한 논고문이었는데, 마침 원고 중 임백령(林百齡)공편을 보신 충청종친회에서 이 논고문을 책으로 발간하자고 제의하여 2014년 11월 발간, 충청종친들께 배부한바 있는 같은 표제의 책이 그 저본입니다. 주저자 종필씨께서는 직장생활 은퇴 후 종중 일에 적극 참여하시면서 우리 선산임씨 씨족사 탐구에 진력하신바 있습니다. 특히『을해보』(1995) 수보(修譜) 때 부유사(副有司)로 참여 상계종사(宗史)를 더욱 깊이 탐구하시어 5차『병진보』(1916)·6차『병신보』(1956)·7차『정사보』(1977)의 상계가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상계를 최초보인『병술보』(1766)로 환원하여 우리 선산 임씨의 정체성을 바로 잡은 바 있습니다.
한편 종필씨께서는 우리 선림(善林)의 자랑스러운 선조 희재(希齋) 임백령공 사적에 특히 천착하시었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희재공은 조선 중종·명종 때 활약한 고위문반으로서, 명종 때 정1품 숭선부원군에 승차하시고 사후「충헌(忠憲)」의 시호까지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에 의해「을사사화」의 주역으로 꼽히시어 공의 사후 30여년이나 지난 시점에 공의 훈작을 위훈(僞勳)으로 몰아 삭탈시키는 오욕을 입으심에 종문 내에서 조차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설사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다 할지라도 종문 내에서 조차 공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 비분(悲憤)한 마음이 일어, 적어도 종문의 입장에서라도 신원(伸寃)을 해드려야겠다 마음먹고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사료를 두루 탐구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사적의 진면목을 다시 일으키고 역사기록의 재평가를 통하여 공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진력하신 것입니다.
더불어「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칭송 받는 대문장가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공, 진남제를 구축하시고 광주목사 등 벼슬도 하신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도 함께 그 사적을 깊이 탐구하여 초고를 쓰셨습니다. 종필씨께서는 이렇게 선산임씨의 상계종사는 물론 선산임씨를 중흥시킨 세 분 령(齡)자 조(祖)와 다른 씨족사에 대해서도 폭넓고 깊이 있게 탐구하신바, 중앙일보 연재「성씨의 고향」시리즈나『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 관향편의「선산임씨」편을 써 대외적으로도 우리 선림(善林)을 알리는데 애쓰신 바 있습니다. 한편, 저도 직장은퇴 후 종필씨의 도움을 받아 저의 고향(경남 고성) 입향조 능복(能福)(구령공의 손자, 완의 자)분의 사적 탐구로 부터 시작하여 시조·중시조에 이르기까지 선림 상계종사와 그 역사적 사실관계 탐구에 나름대로 진력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탐구 노력의 결과, 우리 선림의 시조 임양저(林良貯)공의 오리지널 설화기사를 발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관계와 대조 조명해보니 우리의 득성·득관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함을 밝혀내어 우리씨족의 정체성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데 우리씨족은 선산 김씨와 더불어 선산의 유력 성씨로서 호장(戶長) 종문임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 임씨 상계에까지 탐구범위를 넓혀 각 관향 초기족보를 두루 살피고 여러 참고문헌과 함께 제법 깊이 있는 고구(考究)를 수행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탐구노력은『선산임씨상계대고』·『임씨상계대고(1)(2)』의 논고집으로 편철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종필씨와 저의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 집약된 논고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덧붙일 바는, 근자에 어느 종인이『을해보』(1995) 상계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선림이 평택임씨의 파계(派系)가 된다고 하는 해묵은 주장을 다시 제기하는 일이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병진보』(1916)·『병신보』(1956)·『정사보』(1977)의 상계기록을 심층 분석하여 이 3족보 상계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더욱 소상히 밝히고 위와 같은 주장이 더는 제기되지 않도록 그 논리를 확실히 한바 있으며, 이 책에는 그와 관련한 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책「별첨논고」편 참조, 자세한 내용은 저의 논고집『선산임씨상계대고』·『임씨상계대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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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문은 중시조 만(蔓)자 조(祖)께서 고려 말~조선조 초 영암으로 입향하시어 둥지를 트신 후 7세 즈음에 이르러 특히억령·백령·구령의 걸출하신 3령조(三齡祖)께서 당대의 큰 인물로 활약 우리 종문은 명실상부하게 호남의 명문 망족(望族) 반열에 오르게 되고 후손들은 더욱 족세를 넓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3령조분의 사적을 중심으로 한 기왕의 충청종친회 발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일부 착오를 바로잡고, 상계종사를 보완하면서 족보의 행장·유사·묘지명 등을 두루 참조 중세씨족사에 기억되었으면 하는 여러 선조 분들의 행적도 반영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 선림의 종사탐구에 매진하셨던 종필씨께서 2014년 논고서 발간 후 평생 반려이신 사모님께서 타계하시자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셔서 불운하게도 이승을 떠나시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종필씨께서는 평소 임백령공의 사적과 관련하여 종중에서 전해내려 오는 자학적인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면서 공의 행적에 대하여『조선왕조실록』을 엄밀히 숙독하면 결코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컨대『명종실록』은 선조임금 때 신진사류들이 실권을 가졌을 때 쓰인 기록이고, 그 신진사류들이 선조3년(1570) 4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 끈질기게 선조를 괴롭혀 훈작 후 장장 32년(명종즉위년~선조10), 선조 등극 후 10년 만에야 삭훈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심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한국사』를 보아도, 신진사류 자신들의 정치활동 정당성을 확보하고 안정을 보장 받는다는 현실적인 면에서 이를 밀어 붙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하다가 선조6년(1573) 비로소 정권을 확보하고 선조10년(1577) 인종비 인성왕후가 위독할 때 대비의 지원(至願)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마지못해 내린 조치라 풀이하고 있는 사안입니다.
이 책의 첫 주안점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백령공의 사적을 다른 각도에서 심층 분석하여 결코 우리 후인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자학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종필씨께서 지적하신대로「을사사화」의 주역은 문정왕후이며 공범이 윤원형입니다.
역사적 사실관계를 엄격히 고구(考究)해 보면, 을사사화(1545.8)에서의 임백령 공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부분이 엄연히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나 애석한 일은 공께서 명종즉위사은사로 북경을 다녀오다 중국 땅 영평부에서 급서(急逝)하시지만(1546. 6) 않았어도 그 후유증이 다르게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음은 능히 상상이 가능한 일입니다.
훌륭한 선조를 둔 후손으로서 선조의 자랑스러운진면목을 밝히는 일은 후손의 마땅한 임무일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필씨께서는『왕조실록』을 읽고 또 읽어 공의 참된 사적을 밝혀내 후세에 씌워진 오명을 걷어내고자 노력하신 것 입니다. 이에 저도 미력하나마 역사서를 읽고 원고를 힘껏 보완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언급 드린바와 같이, 상계종사는 종사대로『병진보』~『 정사보』에서 훼손된 선림 정체성의 정설을 알리는 과제가 시급하고 긴요하며, 더불어 임백령공 관련 사적의 재조명 결과를 홍보하여 우리 선림의 자긍심을 높이는 작업도 꼭 필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에 마침 제가 전국종친회 회장의 중책을 맡음을(2018.4) 계기로 우리 씨족사의 진면목을 알릴 책자 발간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일면 미흡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나, 제한된 지면에 두루 다 카버하지 못함을 해량하여 주시고, 앞으로 더욱 우리 종사와 관련 중요한 일화나 종문을 빛낸 사적을 발굴, 우리 종문의 자긍심을 높이는 작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