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임씨의 득관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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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설화에 나오는 득관 연유 |
선산임씨 족보가 전하는 시조설화는 선산임씨의 득관 연유를 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시조 임양저공이 고려에 귀부하려는 경순왕에게 그 불가함을 심히 통절히 간하였는데 이 충간 사실을 뒤에 고려태조가 듣고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이거케 하여 선산에 살게 된 이가 선산관의 득관조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2. 토성분정(土姓分定)의 역사성과 득관 설화 |
선산임씨는 선산의 토성으로서 선산의 세력가문이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것이 선산임씨가 선산의 호장가문이라는 사실이다. 고려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태조 19년 936) 태조 23년(940) 경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9주를 두면서 지방의 주부군현에 대하여 대대적인 개편작업과 함께 토성을 분정 하였는데 이때 경주에서 선산으로 이거하여 호장층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3. 선산이거의 역사적 배경 |
시조 설화에 의하면 선산으로 이거하게 된 연유가 양저공의 충간으로 인해 마치 그 후손이 선산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어떻게 쫓겨 온 가문이 그 지역의 호장이 되고 세력가문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후삼국 말기에는 토지의 경계가 흐려지고 조세와 공부(貢賦)가 일정한 법도가 없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가장 먼저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법도에 맞게 조세와 공부를 부과하고 농사와 양잠에 힘을 기울였다고 되어있다.(『고려사』식화(食貨)조 서문 참조) 후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성취하고자 시행하였던 기본시책들은 무엇보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방향으로 마련되었다. 즉, 왕건은 우선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전란에 휩쓸려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곤궁에 고통을 당해오던 백성들에게 안정을 제공하려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안민(安民)정책, 백성의 힘을 기르는 양민(養民)정책을 폄으로서 결국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정책이 그 우선 기조였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국력의 신장을 도모하여 통일에 대처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정책으로서는 호족들에 대한 유화정책이었는데 타협과 화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호족들에 대한 포섭정책을 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외교적으로 후백제 고립과 친신라정책이었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 달리 처음부터 친신라정책으로 신라의 지지를 얻는 것이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아래 항상 신라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할 때에는 언제나 신라를 도왔다. 태조 13년(930) 안동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난후 이듬해 2월 경순왕이 태수 겸용(兼用)을 보내어 만날 것을 재차 요청하자 왕건은 경주를 방문하여 신라의 군신들을 위로하고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마침내 태조 18년(935)에 이르러 경순왕이 군신과 의논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입조를 요청하자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 화답하고 11월 경순왕이 경주를 출발하여 항복하자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장녀 낙랑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는 동시에 정승을 삼아 태자의 상위에 두고 신라를 경주라 하고 식읍으로 주었다. 한편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도 모두 등용하여 토지와 녹을 후하게 주어 이들을 모두 포섭하였다.(이상『고려사』및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12권 34~35쪽, 65~66쪽 참조) 이와 같이 왕건은 친신라 및 옛 귀족 등 고위 신료에 대해 후대하는 화합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보면 양저공의 자손이 선산으로 이거한 것이 징벌적으로 쫓겨 간 것은 아닌 것이다.
비록 설화의 표현에“분기자손 투우제읍 거선산자선야(分其子孫 投于諸邑 居善山者先也)”라 하여“투(投)”의 의미가 좋은 뜻으로 보이지 않는다하더라도 이것이 설화인 이상 전체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善林이 명문임을 나타내는 설화라는 점에서도 좋은 뜻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 선산의 지명역사 – 신라로 편입된 후 진평왕 36년(614) 일선주(一善州)가 됨.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개편 때 숭선군(崇善郡)으로 개칭. 효공왕 11년(907)부터 신라말(935) 고려태조 19년(936)까지 후백제 영역이었다가 936년 9월 선산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가 최종 승리 삼국이 통일 됨. 고려 성종 14년(995) 선주(善州)로 개편되고, 인종 21년(1143) 일선현이 되었다가 바로 다시 선주로 승격 됨. 조선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선산군으로 개칭되었다가 2년 뒤(1415) 선산도후부로 승격되어 내려옴. 조선말 고종 33년(1896) 선산군이 되었으며 현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미시와 병합됨.
1. 시조설화에 나오는 득관 연유 |
선산임씨 족보가 전하는 시조설화는 선산임씨의 득관 연유를 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시조 임양저공이 고려에 귀부하려는 경순왕에게 그 불가함을 심히 통절히 간하였는데 이 충간 사실을 뒤에 고려태조가 듣고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이거케 하여 선산에 살게 된 이가 선산관의 득관조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2. 토성분정(土姓分定)의 역사성과 득관 설화 |
선산임씨는 선산의 토성으로서 선산의 세력가문이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것이 선산임씨가 선산의 호장가문이라는 사실이다. 고려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태조 19년 936) 태조 23년(940) 경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9주를 두면서 지방의 주부군현에 대하여 대대적인 개편작업과 함께 토성을 분정 하였는데 이때 경주에서 선산으로 이거하여 호장층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3. 선산이거의 역사적 배경 |
시조 설화에 의하면 선산으로 이거하게 된 연유가 양저공의 충간으로 인해 마치 그 후손이 선산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어떻게 쫓겨 온 가문이 그 지역의 호장이 되고 세력가문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후삼국 말기에는 토지의 경계가 흐려지고 조세와 공부(貢賦)가 일정한 법도가 없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가장 먼저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법도에 맞게 조세와 공부를 부과하고 농사와 양잠에 힘을 기울였다고 되어있다.(『고려사』식화(食貨)조 서문 참조) 후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성취하고자 시행하였던 기본시책들은 무엇보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방향으로 마련되었다. 즉, 왕건은 우선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전란에 휩쓸려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곤궁에 고통을 당해오던 백성들에게 안정을 제공하려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안민(安民)정책, 백성의 힘을 기르는 양민(養民)정책을 폄으로서 결국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정책이 그 우선 기조였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확립하고 국력의 신장을 도모하여 통일에 대처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정책으로서는 호족들에 대한 유화정책이었는데 타협과 화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호족들에 대한 포섭정책을 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외교적으로 후백제 고립과 친신라정책이었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 달리 처음부터 친신라정책으로 신라의 지지를 얻는 것이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아래 항상 신라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할 때에는 언제나 신라를 도왔다. 태조 13년(930) 안동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난후 이듬해 2월 경순왕이 태수 겸용(兼用)을 보내어 만날 것을 재차 요청하자 왕건은 경주를 방문하여 신라의 군신들을 위로하고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마침내 태조 18년(935)에 이르러 경순왕이 군신과 의논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입조를 요청하자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 화답하고 11월 경순왕이 경주를 출발하여 항복하자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장녀 낙랑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는 동시에 정승을 삼아 태자의 상위에 두고 신라를 경주라 하고 식읍으로 주었다. 한편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도 모두 등용하여 토지와 녹을 후하게 주어 이들을 모두 포섭하였다.(이상『고려사』및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12권 34~35쪽, 65~66쪽 참조) 이와 같이 왕건은 친신라 및 옛 귀족 등 고위 신료에 대해 후대하는 화합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보면 양저공의 자손이 선산으로 이거한 것이 징벌적으로 쫓겨 간 것은 아닌 것이다.
비록 설화의 표현에“분기자손 투우제읍 거선산자선야(分其子孫 投于諸邑 居善山者先也)”라 하여“투(投)”의 의미가 좋은 뜻으로 보이지 않는다하더라도 이것이 설화인 이상 전체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善林이 명문임을 나타내는 설화라는 점에서도 좋은 뜻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 선산의 지명역사 – 신라로 편입된 후 진평왕 36년(614) 일선주(一善州)가 됨.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개편 때 숭선군(崇善郡)으로 개칭. 효공왕 11년(907)부터 신라말(935) 고려태조 19년(936)까지 후백제 영역이었다가 936년 9월 선산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가 최종 승리 삼국이 통일 됨. 고려 성종 14년(995) 선주(善州)로 개편되고, 인종 21년(1143) 일선현이 되었다가 바로 다시 선주로 승격 됨. 조선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선산군으로 개칭되었다가 2년 뒤(1415) 선산도후부로 승격되어 내려옴. 조선말 고종 33년(1896) 선산군이 되었으며 현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미시와 병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