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상선산임씨의 상계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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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3.png 임은영(林銀永)

고려 중기초반의 선산호장. 선산김씨인 호장 김수(金守)의 장인. 김종직의 『이존록』「선공보도(先公譜圖)」에 나온다. -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의 8세손 김지영(金之瑩)의 배위 김씨(부 김수 모 선산임씨)의 외조부가 된다.

 

p003.png 임영화(林永和), 임보검(林寶劍) 형제

『고려사』열전44 반역5「김문현(金文鉉)」조에 나온다. 김문현( ? ~1388)은 고려 공민왕때 문신으로 선주인(善州人)이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김문현이 선주에 있을 적에 선주사람 임영화가 그 동생 임보검과 함께 이방실(李芳實) 이방실(李芳實) 을 따라서 홍건적을 토벌한 일이 있었다. 이방실이 처형되자 김문현이 임영화의 재산을 노려 수하 20여명을 거느리고 밤에 그 집으로 가 거짓으로 이방실의 무리를 모두 극형에 처한다는 왕명을 내세워 임영화형제를 체포해 처형한 후 재산과 말 아홉필을 모조리 빼앗아 돌아왔다.”(1362년 공민왕 11 이방실 죽음) 이 기사로 보아 당대의 유력 무신 이방실의 휘하에서 홍건적토벌에 공을 세운 선주의 실력자로 보인다.

 

김문현은 그 아버지가 동지밀직사사 김달상이다. 김달상은 오인택과 함께 정권을 잡고 매관매직을 일삼고 왕의 총애를 앞세워 남을 능멸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김문현은 과거에 급제한 후 공민왕 때 거듭 승진하여 성균좨주가 되었다. 형 김군정의 애첩을 건드리다가 들켜 아버지의 미움을 산일도 있다. 신돈을 꼬여서 아버지와 형을 모함하여 죽이기도 하였다. 결국 우왕 때 유배되었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p003.png 임자후(林自栩)

『일선지』에 나온다. 선산토성으로서 남면평성(坪城)에 살았으며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한다.

 

p003.png 임재(林載)

『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도호부「효자」조에 나온다. 명경과에 급제하여 황간 감무(監務)를 지냈다. 부모가 함께 숙환이 들어 조석으로 시약(侍藥)하고, 돌아가신 후 6년의 여묘(廬墓)생활을 하였다. 이에 성종 3년(1472) 효자로 정려(旌閭)하여 표창하였다.

 

김종직의『이존록』에 의하면 부 김숙자의 족숙(族叔)(인척)으로 은사였다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조 초 인물로 보이며 그 이름자가 외자인 점으로 보아 우리의 중시조와는 가까운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 시기 또한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현의『일선지』에는「세종조중 명경과(世宗朝中 明經科). 황간감무(黃澗監務)」로 나오나 명경과는 고려 때 과거과목이고 세종 때에는 황간감무 벼슬이 없었으므로 기록에 착오가 있는듯하다.)

 

 

선주인(善州人) - 선주는 고려 성종 14년(995) 종전의 숭선군이 바뀌어 생긴 지명이다. 고려인종 21년(1143) 일선현으로 바뀌었으므로 공민왕 때에는 일선현이었다.

이방실(李芳實) - 함안이씨의 시조. 고려 충목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호종한 공으로 중랑장, 호군이 됨. 민란진압, 홍건족 격퇴로 대호군, 상장군, 추밀원부사, 서북면 도지휘사 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20여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을 때 안주와 절령에서 참패. 이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총병관 정세운·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박춘에 의해 살해되었다.(1362)

 

 

 

p003.png 임은영(林銀永)

고려 중기초반의 선산호장. 선산김씨인 호장 김수(金守)의 장인. 김종직의 『이존록』「선공보도(先公譜圖)」에 나온다. - 선산김씨의 시조 김선궁의 8세손 김지영(金之瑩)의 배위 김씨(부 김수 모 선산임씨)의 외조부가 된다.

 

p003.png 임영화(林永和), 임보검(林寶劍) 형제

『고려사』열전44 반역5「김문현(金文鉉)」조에 나온다. 김문현( ? ~1388)은 고려 공민왕때 문신으로 선주인(善州人)이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김문현이 선주에 있을 적에 선주사람 임영화가 그 동생 임보검과 함께 이방실(李芳實) 이방실(李芳實) 을 따라서 홍건적을 토벌한 일이 있었다. 이방실이 처형되자 김문현이 임영화의 재산을 노려 수하 20여명을 거느리고 밤에 그 집으로 가 거짓으로 이방실의 무리를 모두 극형에 처한다는 왕명을 내세워 임영화형제를 체포해 처형한 후 재산과 말 아홉필을 모조리 빼앗아 돌아왔다.”(1362년 공민왕 11 이방실 죽음) 이 기사로 보아 당대의 유력 무신 이방실의 휘하에서 홍건적토벌에 공을 세운 선주의 실력자로 보인다.

 

김문현은 그 아버지가 동지밀직사사 김달상이다. 김달상은 오인택과 함께 정권을 잡고 매관매직을 일삼고 왕의 총애를 앞세워 남을 능멸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김문현은 과거에 급제한 후 공민왕 때 거듭 승진하여 성균좨주가 되었다. 형 김군정의 애첩을 건드리다가 들켜 아버지의 미움을 산일도 있다. 신돈을 꼬여서 아버지와 형을 모함하여 죽이기도 하였다. 결국 우왕 때 유배되었다가 교수형을 당했다.

 

p003.png 임자후(林自栩)

『일선지』에 나온다. 선산토성으로서 남면평성(坪城)에 살았으며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한다.

 

p003.png 임재(林載)

『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도호부「효자」조에 나온다. 명경과에 급제하여 황간 감무(監務)를 지냈다. 부모가 함께 숙환이 들어 조석으로 시약(侍藥)하고, 돌아가신 후 6년의 여묘(廬墓)생활을 하였다. 이에 성종 3년(1472) 효자로 정려(旌閭)하여 표창하였다.

 

김종직의『이존록』에 의하면 부 김숙자의 족숙(族叔)(인척)으로 은사였다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조 초 인물로 보이며 그 이름자가 외자인 점으로 보아 우리의 중시조와는 가까운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 시기 또한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현의『일선지』에는「세종조중 명경과(世宗朝中 明經科). 황간감무(黃澗監務)」로 나오나 명경과는 고려 때 과거과목이고 세종 때에는 황간감무 벼슬이 없었으므로 기록에 착오가 있는듯하다.)

 

 

선주인(善州人) - 선주는 고려 성종 14년(995) 종전의 숭선군이 바뀌어 생긴 지명이다. 고려인종 21년(1143) 일선현으로 바뀌었으므로 공민왕 때에는 일선현이었다.

이방실(李芳實) - 함안이씨의 시조. 고려 충목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호종한 공으로 중랑장, 호군이 됨. 민란진압, 홍건족 격퇴로 대호군, 상장군, 추밀원부사, 서북면 도지휘사 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20여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을 때 안주와 절령에서 참패. 이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총병관 정세운·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박춘에 의해 살해되었다.(1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