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와 남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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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산임씨의 중시조는 임만(林蔓)이십니다. |
앞의 선산임씨족보 최초『병술보』에“其間不知爲幾代而且 無文獻之可考 此則子孫之深所慨恨而 自諱蔓至于今日則 繼繼承承 如繩貫珠 故以諱蔓爲中始祖 焉(기간부지위기대이차 무문헌지가고 차즉자손지심소개한이 자휘만지우금일즉 계계승승 여승관주 고이휘만위중시조 언)” “그간 몇 대가 지났는지 알수 없으며, 또한 참고할만한 문헌도 없으므로 이는 자손으로서 심히 한스러운 바이라. 휘 만(蔓)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줄에 구슬을 꿰어 이음과 같이 자손대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휘 만(蔓)을 중시조로 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 휘(諱)-돌아가신 선조의 ‘이름’ 이라는 뜻
그리하여 임만공 이상의 상계조에 대해서는 양저공의 시조 설화 이외에는 더 이상 아는바가 없고 또한 역사성을 가진 문헌자료도 없으므로 선림에서는 이를「설(說)」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선산임씨대동보』을해보 1995 참조)
2. 중시조 임만공은 고려 말 |
조선의 건국(1392 임신) 초기를 전후해서 단신으로 남락(南落)하여 영암(靈岩) 계읍천(溪邑川)(현 학산면 금계리)에 자리를 잡고 선산임씨의 뿌리를 내렸는데, 후손들은 어디서 왔는지 그 출자(出自)도 잘 모르면서 그동안 막연히「중시조의 남락설」을 말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영암군이 발간한『영암군지』가 그 출자를「개경(개성)」이라고 함으로써 밝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영암향교지』,『영암향토지』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즉,『영암군지』제4권의「우거(寓居)」편에(별첨자료 참조)「林蔓 善山人 我太祖朝 自開城 移寓于本鄕…(임만 선산인 아태조조 자개성 이우우본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거(寓居)」란“타지에서 와서 임시로 삶(타향에 삶)”의 뜻인데 이「우거」란에는 여러 사람이 기재되어 있으나「개성출자(開城出自)」는 임만 등 두 분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홀홀단신으로 이 벽지까지 내려와서 살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선 당시의 시대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만공 재세(1370 공민왕 19년~조선조 초)시는 고려 말 조선건국(1392)초기의 정치적 격동기였습니다.
◇ 「무진정변」(우왕 14년 1388 무진년 정월)
임견미(林堅味)(평택임씨)가 이인임, 염흥방과 더불어 고려말 우왕 때 권력의 실세였는데, 염흥방의 가노(家奴)가 조반(趙胖)(전 밀직부사)의 토지를 빼앗는 사건이 빌미가 되어, 우왕 14년(1388) 정월 왕이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임견미 등 50명 이상을 참수케 하고, 1천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종들을 체포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자손도 죄다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여 숨어서도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일대 사건입니다. (2014년 KBS1 TV의 역사드라마“정도전”에 이때의 사실들이 생생히 방영되었습니다.)
◇ 위화도 회군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같은 해 4월 요동정벌을 명받은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 강화도로 방출하고 창왕을 옹립시켜 실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전제개혁과 조선왕조의 개창
실권을 잡은 이성계는 그 다음해(1389)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서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어 그 당시 온 국민의 숙원이었던 전제개혁에 착수하여 공양왕3년(1391) 5월 과전법(科田法)을 공표함으로서 일단락됩니다. 이 전제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로서 산천을 경계로 삼던 과거의 대지주들은 자연히 몰락하여 중소지주로 전락하는 등 권문세족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공양왕 4년(1392) 7월, 왕을 원주로 내쫓고 7.17 마침내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며 이후 태조 3년(1394) 10.25 한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무진정변」으로 임견미의 측근과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원근의 임씨들도 모두 화를 입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권문세족들은 모두 토지를 몰수당하여 재산을 잃었는가 하면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계속 개성에 남아있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개성탈출의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때 탈출한 저명한 林씨는 다음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임만처럼 각관의 중시조가 된 분도 있음) - 임선미(林先味)(두문동72현-순창관) - 임성근(林成槿)(은진관-1세조) - 임분(林蕡)(장흥관 관조)
3. 그렇다면 임만공의 개경 거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신라가 망한 후, 일부 상류귀족 계층은 경순왕을 따라 왕건에 귀부하여 고려 관직을 받고 부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고려에 비협력적인 일부 귀족들은 지방으로 이거하여 역시 그 지방의 세력가로 정착 토성가문으로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왕건에 의하여 선산지방에 투거되었을 임양저공의 후손들도 역시 선산에서 세력가 집안이 되었음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선산김씨 김종직(金宗直)이 쓴『이존록(彛尊錄)』에 있는「선공보도(先公譜圖)」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종직 선대의 가계기록(족보)인「선공보도」를 보면 선산 토성인 임은영(林銀永)의 딸이 선산김씨에게 출가하고 있는데 이때 선산김씨는 대대로 호장(戶長)을 지낸 선산지방 최대 문벌이며, 선산 토성인 임은영 역시 호장으로 세력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金, 林의 양 토성들은 혼맥을 통하여 선산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고려시대 호장(戶長)은 후삼국시대이래 호족의 후예로서 |
재지세력을 대표하여 각 고을 향리(鄕吏)의 상층부를 구성하였던 세력가로서 토성의 주체였습니다. 군현을 대표하는 8명 내지 4명의 토성의 수장들이 호장층을 구성하여, 고을 수령이 파견되기 전에는 실질적인 군현통치기구역할을 하였습니다.(고려 초기 수령이 없는 기간이 50년 이상이었고 나중에 일부 상주수령이 파견되었다하더라도 580 고을중 360 고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기간이 오래 지속되었음) 호장은 대대로 세습되기도 하고 그 자제들은 상경 종사(從仕)의 기회가 부여되어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앙 정부는 지방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자제를「기인(其人)」으로 불러올려 일종의 볼모로 잡기도 하였음)
5. 또 하나의 사유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하나는, |
고려 말 특히 공민왕 때 군현토성이 사족화(士族化)하는데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군공(軍功)을 세운 자들에게 상금을 줄 수가 없게 되어 임기응변책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주게 된 것입니다.
당초 동반 3품 이하 서반 5품 이하의 관직에 설치되었으나, 나중에는 수가 늘어서 모든 품계에 설치되었다고 합니다.(선산임씨의 경우에도 공민왕 때 이방실의 수하로 공을 세운 임영화, 임보검 형제 이야기가『고려사』에 나옵니다.) 개경은 전성기에는 인구가 70만에 이르는 커다란 국제도시였다는데(2012. 1. 14.자 조선일보「만물상」칼럼 참조) 이는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보이기도 합니다.
6. 임만공은 위와 같은 사정으로 보면 |
林씨성을 가진 지방(선산) 세력가의 개경거주 자제분 중의 일원이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입니다.
• 신라 귀족세력들의 지방 분정(分定)과정과 그 지점(地點)을 근거로 한 득관(得貫)과정은 임용원(林容源)이 쓴『선산임씨 상계대고』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7. 그러나 이『영암군지』는 비교적 후대의 기록물로서 |
임만공의 개성출자설을 완전히 뒷바침하기에는 다소간 의문스러운 점이 있기도 합니다.(예컨데, 벼슬기록이 문과급제 이조정랑으로 되어 있는 점) 그런데 종중 내에서는 뒤늦게나마 한 가닥 전승이라도 찾았는지 2차『신사보』(1821)에서‘증 예조좌랑’, 3차『을묘보』(1855), 4차『신묘보』(1891)에서‘문과 예조좌랑 증 호조판서’로 방주를 쓰고 있습니다.(1916년 5차『병자보』는‘태조 이조좌랑’이라고 고치고 있습니다만, 이 족보는 상계 방주기록에 문제가 많은 족보입니다.) 그래서 종중에서는 임만공을「좌랑공」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1. 선산임씨의 중시조는 임만(林蔓)이십니다. |
앞의 선산임씨족보 최초『병술보』에“其間不知爲幾代而且 無文獻之可考 此則子孫之深所慨恨而 自諱蔓至于今日則 繼繼承承 如繩貫珠 故以諱蔓爲中始祖 焉(기간부지위기대이차 무문헌지가고 차즉자손지심소개한이 자휘만지우금일즉 계계승승 여승관주 고이휘만위중시조 언)” “그간 몇 대가 지났는지 알수 없으며, 또한 참고할만한 문헌도 없으므로 이는 자손으로서 심히 한스러운 바이라. 휘 만(蔓)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줄에 구슬을 꿰어 이음과 같이 자손대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휘 만(蔓)을 중시조로 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 휘(諱)-돌아가신 선조의 ‘이름’ 이라는 뜻
그리하여 임만공 이상의 상계조에 대해서는 양저공의 시조 설화 이외에는 더 이상 아는바가 없고 또한 역사성을 가진 문헌자료도 없으므로 선림에서는 이를「설(說)」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선산임씨대동보』을해보 1995 참조)
2. 중시조 임만공은 고려 말 |
조선의 건국(1392 임신) 초기를 전후해서 단신으로 남락(南落)하여 영암(靈岩) 계읍천(溪邑川)(현 학산면 금계리)에 자리를 잡고 선산임씨의 뿌리를 내렸는데, 후손들은 어디서 왔는지 그 출자(出自)도 잘 모르면서 그동안 막연히「중시조의 남락설」을 말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영암군이 발간한『영암군지』가 그 출자를「개경(개성)」이라고 함으로써 밝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영암향교지』,『영암향토지』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즉,『영암군지』제4권의「우거(寓居)」편에(별첨자료 참조)「林蔓 善山人 我太祖朝 自開城 移寓于本鄕…(임만 선산인 아태조조 자개성 이우우본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거(寓居)」란“타지에서 와서 임시로 삶(타향에 삶)”의 뜻인데 이「우거」란에는 여러 사람이 기재되어 있으나「개성출자(開城出自)」는 임만 등 두 분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홀홀단신으로 이 벽지까지 내려와서 살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선 당시의 시대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만공 재세(1370 공민왕 19년~조선조 초)시는 고려 말 조선건국(1392)초기의 정치적 격동기였습니다.
◇ 「무진정변」(우왕 14년 1388 무진년 정월)
임견미(林堅味)(평택임씨)가 이인임, 염흥방과 더불어 고려말 우왕 때 권력의 실세였는데, 염흥방의 가노(家奴)가 조반(趙胖)(전 밀직부사)의 토지를 빼앗는 사건이 빌미가 되어, 우왕 14년(1388) 정월 왕이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임견미 등 50명 이상을 참수케 하고, 1천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종들을 체포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자손도 죄다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여 숨어서도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일대 사건입니다. (2014년 KBS1 TV의 역사드라마“정도전”에 이때의 사실들이 생생히 방영되었습니다.)
◇ 위화도 회군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같은 해 4월 요동정벌을 명받은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 강화도로 방출하고 창왕을 옹립시켜 실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전제개혁과 조선왕조의 개창
실권을 잡은 이성계는 그 다음해(1389)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서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어 그 당시 온 국민의 숙원이었던 전제개혁에 착수하여 공양왕3년(1391) 5월 과전법(科田法)을 공표함으로서 일단락됩니다. 이 전제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로서 산천을 경계로 삼던 과거의 대지주들은 자연히 몰락하여 중소지주로 전락하는 등 권문세족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공양왕 4년(1392) 7월, 왕을 원주로 내쫓고 7.17 마침내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며 이후 태조 3년(1394) 10.25 한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무진정변」으로 임견미의 측근과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원근의 임씨들도 모두 화를 입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권문세족들은 모두 토지를 몰수당하여 재산을 잃었는가 하면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계속 개성에 남아있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개성탈출의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때 탈출한 저명한 林씨는 다음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임만처럼 각관의 중시조가 된 분도 있음) - 임선미(林先味)(두문동72현-순창관) - 임성근(林成槿)(은진관-1세조) - 임분(林蕡)(장흥관 관조)
3. 그렇다면 임만공의 개경 거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신라가 망한 후, 일부 상류귀족 계층은 경순왕을 따라 왕건에 귀부하여 고려 관직을 받고 부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고려에 비협력적인 일부 귀족들은 지방으로 이거하여 역시 그 지방의 세력가로 정착 토성가문으로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왕건에 의하여 선산지방에 투거되었을 임양저공의 후손들도 역시 선산에서 세력가 집안이 되었음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선산김씨 김종직(金宗直)이 쓴『이존록(彛尊錄)』에 있는「선공보도(先公譜圖)」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종직 선대의 가계기록(족보)인「선공보도」를 보면 선산 토성인 임은영(林銀永)의 딸이 선산김씨에게 출가하고 있는데 이때 선산김씨는 대대로 호장(戶長)을 지낸 선산지방 최대 문벌이며, 선산 토성인 임은영 역시 호장으로 세력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金, 林의 양 토성들은 혼맥을 통하여 선산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고려시대 호장(戶長)은 후삼국시대이래 호족의 후예로서 |
재지세력을 대표하여 각 고을 향리(鄕吏)의 상층부를 구성하였던 세력가로서 토성의 주체였습니다. 군현을 대표하는 8명 내지 4명의 토성의 수장들이 호장층을 구성하여, 고을 수령이 파견되기 전에는 실질적인 군현통치기구역할을 하였습니다.(고려 초기 수령이 없는 기간이 50년 이상이었고 나중에 일부 상주수령이 파견되었다하더라도 580 고을중 360 고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기간이 오래 지속되었음) 호장은 대대로 세습되기도 하고 그 자제들은 상경 종사(從仕)의 기회가 부여되어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앙 정부는 지방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자제를「기인(其人)」으로 불러올려 일종의 볼모로 잡기도 하였음)
5. 또 하나의 사유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하나는, |
고려 말 특히 공민왕 때 군현토성이 사족화(士族化)하는데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군공(軍功)을 세운 자들에게 상금을 줄 수가 없게 되어 임기응변책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주게 된 것입니다.
당초 동반 3품 이하 서반 5품 이하의 관직에 설치되었으나, 나중에는 수가 늘어서 모든 품계에 설치되었다고 합니다.(선산임씨의 경우에도 공민왕 때 이방실의 수하로 공을 세운 임영화, 임보검 형제 이야기가『고려사』에 나옵니다.) 개경은 전성기에는 인구가 70만에 이르는 커다란 국제도시였다는데(2012. 1. 14.자 조선일보「만물상」칼럼 참조) 이는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보이기도 합니다.
6. 임만공은 위와 같은 사정으로 보면 |
林씨성을 가진 지방(선산) 세력가의 개경거주 자제분 중의 일원이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입니다.
• 신라 귀족세력들의 지방 분정(分定)과정과 그 지점(地點)을 근거로 한 득관(得貫)과정은 임용원(林容源)이 쓴『선산임씨 상계대고』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7. 그러나 이『영암군지』는 비교적 후대의 기록물로서 |
임만공의 개성출자설을 완전히 뒷바침하기에는 다소간 의문스러운 점이 있기도 합니다.(예컨데, 벼슬기록이 문과급제 이조정랑으로 되어 있는 점) 그런데 종중 내에서는 뒤늦게나마 한 가닥 전승이라도 찾았는지 2차『신사보』(1821)에서‘증 예조좌랑’, 3차『을묘보』(1855), 4차『신묘보』(1891)에서‘문과 예조좌랑 증 호조판서’로 방주를 쓰고 있습니다.(1916년 5차『병자보』는‘태조 이조좌랑’이라고 고치고 있습니다만, 이 족보는 상계 방주기록에 문제가 많은 족보입니다.) 그래서 종중에서는 임만공을「좌랑공」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