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토성(土姓)과 호장(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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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원

3. 토성(土姓)과 호장(戶長)

1)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

『세종실록지리지』(이하『실지』라 함)란『세종대왕실록』(단종 2년 1454 완성)에 실려 있는 전국지리서 8권 8책을 말한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선 초기 전국지리서로서 사서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지리서이고 그 내용은 국가통치에 필요한 여러 자료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세종 6년(1424)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편찬이 시작되고 그 이듬해 1425년『경상도지리지』가 발간되고 나머지 7도의 지리지를 한데 모아 편찬한 것이『신찬 팔도지리지』인데, 8년의 작업 끝에 세종 14년(1432) 완성된다. 이『신찬 팔도지리지』를 다소 가감 정리하여 펴낸 것이『세종실록지리지』이다.『세종대왕실록』을 보면 세종이 윤회, 신장 등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연혁을 고증하여 이 책을 지었고 1432년(세종 14)에 책자가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실지』 성씨조의 중요성

이『실지』성씨조는 우리나라 성관의 형성과 유래에 관한 최초의 기본 자료로서 우리나라 성씨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겨져 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역(力)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 신분적 재편성을 단행한 성씨 체계가 뒷날 이『실지』의 성씨로 나타난 것이다.

 

『실지』소재 각 읍 성씨조는 바로 고려시대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관제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초기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의 본관의 구체적 모습이 담긴 기본 자료가 이『실지』성씨조인 것이다. 이『실지』성씨조는 우리의 본관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새로이 깊이 새겨보아야 할 토성(土姓)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실지』성씨조의 토성이 담고 있는 성씨 본래의 역사적 의의를 간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착오 내지 문제점이 생긴다.

① 한국의 성관 유래를 중국의 경우와 동일시 한 점

② 한국 성관의 주체가 토성인데도 그 시조가 중국으로 부터 왔다는 시조동래설을 강조하는 점

③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동성도 이본(異本)은 타성과 다름없다는 사실의 기피

④ 신라의 왕성과 귀족성을 제외하면 모두 고려 초기에 나왔다는 점의 간과

⑤ 우리는 중국처럼 봉후건국 함으로써 사성(賜姓), 수씨(受氏)한 것이 아니고, 고려 초기 토성을 분정(分定) 받은 뒤 본관별로 봉작읍호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됨으로써 본관을 받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모르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 점

⑥ 어떤 경우에는 고려 초기 이래 여말 선초까지 지방의 신흥세력들은 그 주류가 향리가계에서 출자하였는데도 조선 후기 족보에서는 그 선조가 향리였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향리 관련 자료를 삭제함으로써 조상의 세계(世系)와 직역(職役)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있게 된다.

 

이『실지』는 우리나라 성관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인데도, 편찬이후 한말까지 민간에 공개가 되지 않아 우리나라 성관의 원형을 상실하게 된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성일조(同姓一祖)를 강조하고 있는 우리 임씨의 상계문제도『실지』성씨조를 참조하여 그 연원과 역사성을 다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으로생각된다.(『실지』성씨조 토성 임씨의 본관 현황과, 참고로『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임씨 본관을 첨부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 임씨본관 (세종 14년 1432)

• 경기도 : 없음. 망성(亡姓) : 해풍군(貞州)(亡來續姓), 안산현(蓮城)

황해도 : 해주목, 신천현

- 망성(亡姓) : 토산(兎山), 가화(嘉禾), 은율, 장연현(來姓이나 今皆無)

충청도 : 진천현, 평택현, 황간현 금화부곡(續姓), 시진현, 채운향, 임천(林川)군

- 망성(亡姓) : 정산(定山)현(청양군), 홍산(鴻山)현(부여군)

강원도 : 양양부(續姓), 동산현(洞山)(來姓), 통천군(來姓), 임도(臨道)현 (續姓), 울진현(선사仙槎), 이천(伊川)현(續姓), 춘천부(續姓) - 망성(亡姓) : 벽산현, 통구현

경상도 : 울산군(학성), 현풍현(苞山), 안동부 풍산현·길안현(續姓), 영해 부(예주) 안정(安貞)현·신평부곡(續姓), 예천군·웅천부곡(續 姓), 상주목(續姓-개령에서)·개령현, 선산부, 성주목(星山) (京來姓)·팔거(八莒)현(칠곡)(來姓), 진주목 영선현(고성 영 현), 의령현(續姓), 이안(利安)현(안음-안의)

전라도 : 익산군, 여량현(續姓)·피제(皮堤)부곡(續姓), 용안현(續姓), 풍제 현, 옥구현, 고부군·독변소(禿邊所), 보안(保安)현(續姓), 나주목 회진현·거평부곡(장산현), 남원부(용성)(續姓), 순창군(옥천)· 복흥현·치등소, 용담현, 구고현, 운봉현 복흥소, 순천부 부유현 (續姓), 여수현·송림부곡·하이사부곡, 보성군 복성현, 장흥부 장택현, 제주목(續姓)

- 망성(亡姓) : 옥야현, 고부군 우일부곡

평안도 : 토산(土山)현 - 입진성(入鎭姓) : 용강현, 안북부, 순주군, 맹주, 은주, 곽주, 영덕진

함경도 : 정주(續姓.入姓)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 임씨본관 (중종 25년 1530)

• 경기도 : 풍덕군

• 황해도 : 신천군, 토산현, 해주목, 송화현, 은율현, 장연현

• 충청도 : 진천현, 황간현(續), 임천군, 정산(定山)현, 은진현(시진, 채운), 평택현, 홍산(鴻山)현, 아산현(개경에서)

• 강원도 : 양양도호부(본부·동산 洞山), 간성군(울진에서), 통천군(본군· 임도.운암), 울진현, 춘천도호부, 금성현(통구), 이천(伊川)현(울 진에서)

• 경상도 : 울산군, 안동대도호부(임하·풍산·길안), 영해도호부 예천군 (본군·동노冬老〈속성〉), 비안(比安)현(안정安貞·신평), 현 풍현, 상주목(본주〈속성〉·평산방), 성주목(본주〈개경서〉· 팔거, 선산도호부, 금산(金山)군(조마助馬), 개령현, 진주목(영 선), 의령현, 안음현(이안利安)

• 전라도 : 전주부(옥야·경명), 익산군, 고부군(본군·우일·독변) 여산 군(여량·피제皮堤), 부안현(보안), 옥구현, 용안현(풍제), 함열 현, 나주목(회진·거평), 장흥도호부(장택) 제주목, 남원도호부 (본부·남전), 순창군(본군·복흥·치등) 용담현, 임실현(구 고), 장수현(본군·복흥) 순천도호부(본부·부유·하이사下伊 沙·송림), 보성군(조양·복성), 구례현(남전)

• 평안도 : 용강현(윤진에서), 안주목(풍주에서), 의주목(구현丘縣에서), 구 성도호부(무창), 곽산군(해주에서), 순천군(백주, 염주에서) 상원 (祥原)군, 맹산현(용강, 이악利岳에서), 은산(殷山)현(영풍에서)

• 함경도 : 정평도호부, 안변도호부(상음霜陰〈상림에서〉·영풍)

※ 진한 부분들은『세종실록지리지』에 없는 지명

 

2) 토성(土姓)의 개념

토성(土姓)이란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재지(在地)씨족집단의 성씨에 대한 총칭이다.(토박이 성) 이 용어는『경상도지리지』나『실지』를 편찬하던 15세기 전반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실록이나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일체보이지 않으며 『실지』보다 약 50년 뒤에 나온『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적 인물조에 약간 보일뿐 성씨조에는 이미 쓰이지 않았다.

토성은 자연적 촌락 공동체로서의‘토(土)’와 혈연적 씨족 집단으로서의‘성(姓)’으로 구성되었다.『실지』에 의하면 토성은 고적(古籍)과 관(關)에 기재되어 있는 성씨를 지칭한다고 하였는데,‘고적’이란 고려초기부터 전해오는 성씨관계 자료이며,‘관’이란 공문서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지리지의 편찬을 위한 작업으로 각 도에서 보고한 성씨관계 기록을 담은 문서이다. 그러므로『실지』소재‘토성’은 당초 토성에서 소멸된 망성(亡姓), 이주성(移住姓)인 래성(來姓)·속성(續姓)등과 다르게 지방전래의 고적에 쓰인 용어로서 토박이 성 즉 고려 초 성씨 분정시에 그곳에 토착하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유력 씨족 또는 그곳을 본관으로 하면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그 군현의 지배 성단이 곧 토성이었던 것이다.

 

이 토성은 고려왕조가 확립된 다음 나타난 사성(賜姓)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 토성의 구분과 용어

토성은 그 출자지(出自地)에 따라

① 주·부·군·현·성

② 촌성

③ 향·소·부곡성으로 구분되고 신분과 거주지 및 현존유무에 따라 인리성(人吏姓) · 백성성(百姓姓) · 차성(次姓) · 래성(來姓) · 입진성(入鎭姓) · 속성(續姓) · 망성(亡姓)등으로 나누어졌다.

• 인리성(人吏姓) - 관아·읍사(邑司) 소재의 지배성단

• 백성성(百姓姓) - 인리성(人吏姓) 다음의 전기촌성(前期村姓)

• 래성(來姓) - 자의로 타지방에서 입래(入來)한 성씨

• 속성(續姓) -『실지』편찬 당시에 비로소 속록(續錄)한 성이라는 뜻

즉, 고적(古籍)에는 없고 고려후기 내지 여말선초에 형성된 성씨  

 

3) 토성의 형성

토성형성의 문제는 그것의 의미와 같이 군현의 구역형성과정과 토착씨족의 발전과정 및 그것의 한성화(漢姓化)의 과정과 상호 연관된다. 형성 시기는 토성의 분포지역이 말하여 주듯이 신라말 고려초기였다.(과거의 신라영역에 한하여 분포되어 있고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이북지역에는 하나도 없다.) 토성의 분정 시기는 비록 고려초라 하더라도 그 토성의 씨족적 유래는 벌써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것에 틀림없다. 그래서 토성 분정 시에는 신라의 진골, 6두품 계층이나 성주·촌주로서 이미 한성(漢姓)을 가진 성단은 그 성단을 가진 채 각기 출신 군현의 토성이 되었고, 아직 한성을 가지지 못한 세력은 자칭성(自稱姓)하거나 사성(賜姓)과 동시에 토성으로 책정된 두 가지 경우가 예상된다.

 

토성의 전신은 신라 이래 각 읍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족단이었고 군현의 전신인 성·촌이 후세 군현으로 개편될 때 그곳을 지배하던 종래의 성주·촌주 들이 후삼국시대에 호족이 되었다. 이들 호족가운데는 종래의 신라 귀성(貴姓)을 가진 자가 많겠고 그 다음은 고려왕조의 성립과 함께 국가로 부터 사성을 받는다든지 또는 중국의 유명성을 모방하여 자칭성을 가짐으로서 태조왕건의 말년에 가서는 각 읍 토성으로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상경 종사한 재경세력이나 재지이족(在地吏族)들은 군현토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4) 토성과 호장(戶長)

◇ 토성과 재지세력

고려 초기에 전국 주 · 부 · 군 · 현과 향 · 소 · 부곡 등 군현과 임내별로 분정된 성씨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 · 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호족이었으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 거주지 별로 토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고급관인을 출신 성씨별로 분석해보면 소수의 중국 · 발해계의 귀화인·유민을 제외하면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태조공신(太祖功臣 :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각기 성과 본관을 분정 또는 하사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 성씨들은 본관을 떠나 일찍이 서울로 진출하여 재경관인이 되거나 그대로 토착한 성씨는 각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향리 · 장리(長吏)층을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러한 군현 성씨의 진출 기반은 강력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적 기반 및 학문적 행정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였다.고려 광종이후에 새로 진출한 성씨들은 대개 군현 향리층의 자제였다.  

 

그 후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방 성씨의 진출이 활발하여 지배층의 저변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추세는 고려후기 또는 조선 초기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집권세력의 변동, 지배세력의 신진대사시 신흥세력은 주로 지방의 토착성씨에서 공급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본관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그 뿌리를 깊게 내리고 향리층끼리 연대를 형성하고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 유이(流移), 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였다.그 결과 기존 토성의 소멸에서 망성(亡姓)이 생기고, 북진정책에 따른 사민(徙民)에서 입진성이 생기고, 지역적인 이동에서 경래성(京來姓) · 래성(來姓) · 입성(入姓)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고려후기 군현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하여 속성(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은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실지』편찬시기)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현 토성에서 나왔다.

 

◇ 토성의 주체 - 호장층(戶長層)

토성의 주체는 후삼국시대 호족의 후예인 호장층 이었으며 고려시대 지방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다. 이러한 각 읍 향리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호장층은 마치 서울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관요직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토착세력은 호장층의 확보여부가 그들 성씨의 세력 소장에 직결되었다. 호장층은 동시에 여초 이래 여말까지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관인을 산출시키는 공급원 역할을 했던 것이며, 그래서 지방향리에서 서울로 진출한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대에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성씨의 시조 가운데에는 호장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시대 군현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사의 구성주체인 호장층이었으며 이들은 그 직역(職役)을 철저히 세습해 나감으로서 고려시대의 읍사향리제는 봉건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군현의 호장 정원과『실지』소재 각 읍 토성 수는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군현 행정의 기초인 읍사는 호장층에 의해 조직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향리 문제는 토성과 읍사(邑司) 문제와를 관련짓지 않고는 그 실체를 밝힐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한편 고려의 향리직제는 문종 5년(1051) 10월에 향리의 직급별 승진체계를 정함으로서 일단 완비되었다. 그 승진 순서는 후단사(後壇史)에서 출발하여 병창사(兵倉史) → 주부군현사(史) → 부병(副兵)·창정(倉正) → 부호정(副戶正) → 호정(戶正) → 병·창정(兵.倉正) → 부호장(副戶長) → 호장(戶長)의 아홉 단계를 밟아 향리의 최고위 지위인 호장에 이르게 되었다.

 

◇ 재지세력의 중앙 진출

고려왕조의 창건과 통일의 주역자가 되었던 지방호족들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재경세력과 토착세력으로 분화되었다. 고려왕조는 이 양자를 연결 또는 조정하는 제도로 사심관(事審官)과 기인(其人)제를 활용하였다. 중앙정부는 중앙집권하에 따라 향직의 개편 외관의 파견 등을 통하여 재지 토성의 군·현 지배권을 수렴하는 동시에 그들의 자제를 중앙관인화 시켜나갔다. 이에 고려초 군·현의 읍사를 장악하고 있던 호장층의 자제들이 계속 상경 종사하면서 새로운 지배세력을 공급해 나갔던 것이다.

 

▷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에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료. 기원은 경순왕이 항복하여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동시에 여러 공신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 향직을 다스리게 한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사심관은 기인(其人)과 더불어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성종 2년(983) 지방관제가 실시되고 체제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복수의 사심관을 임명하였으며 후대에 갈수록 폐단이 발생하여 충숙왕 5년(1318) 완전 폐지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는 이 사심관제를 답습한 것이다.

 

▷ 기인(其人)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토호세력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있게 한 제도. 왕건의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세력에 대한 포섭조처로서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다. 본래 기인의 임무는 10년 내지 15년간 중앙관아의 이속격으로 잡무에 종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들 지방에 관한 여러 가지 일도 다스렸다. 고려후기에 이르면 일종의 천역제도로 변하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상급향리의 자제는 여전히 거기에서 제외되고 하급향리의 자제만 노역에 사역되었다. 충숙왕 5년(1336)에 혁파되었다가 충혜왕 4년(1343)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질서있게 합리적으로 이용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폐지되었다. 한편, 토성의 중앙 진출 과정은 그 시기와 직역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토성의 성분에 따라서도 상이하였다.

 

우선 시기별로는

① 고려왕조 창건에 적극 참여하여 태조조에 이미 재경 권귀(權貴)가 된 태조공신(三韓功臣) 계열과

② 광종이후 부터 군현의 재지 토성에서 향공(鄕貢) 상경유학 · 시위(侍衛) · 선군(選軍) 등의 수단을 통하여 새로이 상경 종사한 계열로 구분해 볼수 있다.

 

개국공신 2천명을 포함하여 태조공신이 3,200명이나 되며 이는 중앙과 지방 세력을 총망라한 것으로 당시 이들의 거의 모두가 군현토성출신이었음을 감안하면 재지이족의 진출상황은 대단하였으며 이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다음에 광종(950~975), 성종(982~997) 이후에 있어 군현토성의 진출과정은 왕조 창건시와는 많이 달라지게되었다. 왕조 창건의 주체 세력들은 왕권확립과정에서 대부분 도태되고 새로운 관인의 보충문제가 생겼다. 이에는 유교적인 학문소양과 행정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야 가능했으며, 그것이 광종의 과거제 실시와 성종의 적극적인 교육장려 정책에 의해 달성 될 수 있었다.

 

광종9년(958)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향공진사(鄕貢進士)도 선발되었는데 그 선발 주체는 계수관(界首官) 이었고 응시자격은 주로 상급 향리층 자제였다. 당시 과거제도는 군현 토성의 자제를 선발하여 중앙의 새로운 관인화를 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그와 동시에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며 그를 위해 실시한 것이 성종 때의 지방교육 장려책이었다.

 

고려의 과거 제도는 재지 토성 자제들에게 중요한 출사의 하나였고 재경관인 사회에 있어서는 사환(仕宦-벼슬살이) 진출 상 하나의 여과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진출로인 음서(蔭敍)의 경우를 보면 양자가 이론상 별개일 것 같으나 당시 문벌 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자의 관계가 밀접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구분이 애매하였다. 제도적 형식적으로는 관료제적 과거제가 실시되었다하더라도 그 운영은 귀족제적 상황에서 실시되고 있었다고 본다.(더 빠르게 더 높게 승진하기 위하여 학문적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과거였다.) 고려왕조의 발전에 따라 외관(外官)이 증파되고 지방토성의 점진적 흡수에 따라 관인사회의 폭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재경관인 가운데 토성의 수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당대지배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고려 후기 이래 일반화 되었다.

 

고려 전기에 문벌귀족도 그 주류가 군현의 토성에서 유래하였듯이 후기의 신흥사대부도 대부분 토성 향리에서 나왔다.『용재총화』에서“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은 모두 군현의 토성에서 나왔다.”고 하였듯 조선왕조의 가문들도 대개 고려시대 군현이족의 후예였다.

 

 

* 향공(鄕貢) · 향공진사(鄕貢進士) : 고려시대 계수관시(界首官試)에 합격한 사람에 대한 호칭(사전적 의미는 지방수령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는 뜻) 현종 15년(1024)부터 실시되었으며 주로 지방향리의 자제가 독점하였다.(덕종 때부터는 국자감생과 합쳐 국자감시가 실시됨) 이 시험에 합격하면 향공진사가 되었고 다시 예부시에 합격하면 개경으로 생활근거를옮기고 입사(入仕) 출세의 길에 들어선다. 고려 후기 특히 소백산맥 남쪽의 산간 분지에서 입사한 호장층이 많았다.

* 시위(侍衛) : 임금 또는 왕실을 곁에서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

* 계수관(界首官) : 고려 현종 때 설치된 3경.4도호부.8목의 지방장관을 말한다. 우리나라 독자의 고유한 제도였다. 고려는 중앙의 관할 하에 전국이 교통로나 대읍을 중심으로 몇 개의 큰 단위로 형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다스린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계수관 중심의 체제였다. 주요기능으로는 그 관내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향공 선발의 임무가 있었다. 계수관은 향교를 도회소(都會所)로 삼아 수업과 시험을 치렀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 잡록류의 책. 중종 20년(1525) 경주에서 간행됨.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역사·지리·학문·종교·음악·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다.

 

- 임용원

3. 토성(土姓)과 호장(戶長)

1)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

『세종실록지리지』(이하『실지』라 함)란『세종대왕실록』(단종 2년 1454 완성)에 실려 있는 전국지리서 8권 8책을 말한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선 초기 전국지리서로서 사서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지리서이고 그 내용은 국가통치에 필요한 여러 자료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세종 6년(1424)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편찬이 시작되고 그 이듬해 1425년『경상도지리지』가 발간되고 나머지 7도의 지리지를 한데 모아 편찬한 것이『신찬 팔도지리지』인데, 8년의 작업 끝에 세종 14년(1432) 완성된다. 이『신찬 팔도지리지』를 다소 가감 정리하여 펴낸 것이『세종실록지리지』이다.『세종대왕실록』을 보면 세종이 윤회, 신장 등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연혁을 고증하여 이 책을 지었고 1432년(세종 14)에 책자가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  『실지』 성씨조의 중요성

이『실지』성씨조는 우리나라 성관의 형성과 유래에 관한 최초의 기본 자료로서 우리나라 성씨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겨져 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역(力)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 신분적 재편성을 단행한 성씨 체계가 뒷날 이『실지』의 성씨로 나타난 것이다.

 

『실지』소재 각 읍 성씨조는 바로 고려시대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관제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초기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의 본관의 구체적 모습이 담긴 기본 자료가 이『실지』성씨조인 것이다. 이『실지』성씨조는 우리의 본관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새로이 깊이 새겨보아야 할 토성(土姓)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실지』성씨조의 토성이 담고 있는 성씨 본래의 역사적 의의를 간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착오 내지 문제점이 생긴다.

① 한국의 성관 유래를 중국의 경우와 동일시 한 점

② 한국 성관의 주체가 토성인데도 그 시조가 중국으로 부터 왔다는 시조동래설을 강조하는 점

③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동성도 이본(異本)은 타성과 다름없다는 사실의 기피

④ 신라의 왕성과 귀족성을 제외하면 모두 고려 초기에 나왔다는 점의 간과

⑤ 우리는 중국처럼 봉후건국 함으로써 사성(賜姓), 수씨(受氏)한 것이 아니고, 고려 초기 토성을 분정(分定) 받은 뒤 본관별로 봉작읍호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됨으로써 본관을 받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모르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 점

⑥ 어떤 경우에는 고려 초기 이래 여말 선초까지 지방의 신흥세력들은 그 주류가 향리가계에서 출자하였는데도 조선 후기 족보에서는 그 선조가 향리였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향리 관련 자료를 삭제함으로써 조상의 세계(世系)와 직역(職役)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있게 된다.

 

이『실지』는 우리나라 성관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인데도, 편찬이후 한말까지 민간에 공개가 되지 않아 우리나라 성관의 원형을 상실하게 된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성일조(同姓一祖)를 강조하고 있는 우리 임씨의 상계문제도『실지』성씨조를 참조하여 그 연원과 역사성을 다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것으로생각된다.(『실지』성씨조 토성 임씨의 본관 현황과, 참고로『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임씨 본관을 첨부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 임씨본관 (세종 14년 1432)

• 경기도 : 없음. 망성(亡姓) : 해풍군(貞州)(亡來續姓), 안산현(蓮城)

• 황해도 : 해주목, 신천현

- 망성(亡姓) : 토산(兎山), 가화(嘉禾), 은율, 장연현(來姓이나 今皆無)

• 충청도 : 진천현, 평택현, 황간현 금화부곡(續姓), 시진현, 채운향, 임천(林川)군

- 망성(亡姓) : 정산(定山)현(청양군), 홍산(鴻山)현(부여군)

• 강원도 : 양양부(續姓), 동산현(洞山)(來姓), 통천군(來姓), 임도(臨道)현 (續姓), 울진현(선사仙槎), 이천(伊川)현(續姓), 춘천부(續姓) - 망성(亡姓) : 벽산현, 통구현

• 경상도 : 울산군(학성), 현풍현(苞山), 안동부 풍산현·길안현(續姓), 영해 부(예주) 안정(安貞)현·신평부곡(續姓), 예천군·웅천부곡(續 姓), 상주목(續姓-개령에서)·개령현, 선산부, 성주목(星山) (京來姓)·팔거(八莒)현(칠곡)(來姓), 진주목 영선현(고성 영 현), 의령현(續姓), 이안(利安)현(안음-안의)

• 전라도 : 익산군, 여량현(續姓)·피제(皮堤)부곡(續姓), 용안현(續姓), 풍제 현, 옥구현, 고부군·독변소(禿邊所), 보안(保安)현(續姓), 나주목 회진현·거평부곡(장산현), 남원부(용성)(續姓), 순창군(옥천)· 복흥현·치등소, 용담현, 구고현, 운봉현 복흥소, 순천부 부유현 (續姓), 여수현·송림부곡·하이사부곡, 보성군 복성현, 장흥부 장택현, 제주목(續姓)

- 망성(亡姓) : 옥야현, 고부군 우일부곡

• 평안도 : 토산(土山)현 - 입진성(入鎭姓) : 용강현, 안북부, 순주군, 맹주, 은주, 곽주, 영덕진

• 함경도 : 정주(續姓.入姓)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 임씨본관 (중종 25년 1530)

• 경기도 : 풍덕군

• 황해도 : 신천군, 토산현, 해주목, 송화현, 은율현, 장연현

• 충청도 : 진천현, 황간현(續), 임천군, 정산(定山)현, 은진현(시진, 채운), 평택현, 홍산(鴻山)현, 아산현(개경에서)

• 강원도 : 양양도호부(본부·동산 洞山), 간성군(울진에서), 통천군(본군· 임도.운암), 울진현, 춘천도호부, 금성현(통구), 이천(伊川)현(울 진에서)

• 경상도 : 울산군, 안동대도호부(임하·풍산·길안), 영해도호부 예천군 (본군·동노冬老〈속성〉), 비안(比安)현(안정安貞·신평), 현 풍현, 상주목(본주〈속성〉·평산방), 성주목(본주〈개경서〉· 팔거, 선산도호부, 금산(金山)군(조마助馬), 개령현, 진주목(영 선), 의령현, 안음현(이안利安)

• 전라도 : 전주부(옥야·경명), 익산군, 고부군(본군·우일·독변) 여산 군(여량·피제皮堤), 부안현(보안), 옥구현, 용안현(풍제), 함열 현, 나주목(회진·거평), 장흥도호부(장택) 제주목, 남원도호부 (본부·남전), 순창군(본군·복흥·치등) 용담현, 임실현(구 고), 장수현(본군·복흥) 순천도호부(본부·부유·하이사下伊 沙·송림), 보성군(조양·복성), 구례현(남전)

• 평안도 : 용강현(윤진에서), 안주목(풍주에서), 의주목(구현丘縣에서), 구 성도호부(무창), 곽산군(해주에서), 순천군(백주, 염주에서) 상원 (祥原)군, 맹산현(용강, 이악利岳에서), 은산(殷山)현(영풍에서)

• 함경도 : 정평도호부, 안변도호부(상음霜陰〈상림에서〉·영풍)

※ 진한 부분들은『세종실록지리지』에 없는 지명

 

2) 토성(土姓)의 개념

토성(土姓)이란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재지(在地)씨족집단의 성씨에 대한 총칭이다.(토박이 성) 이 용어는『경상도지리지』나『실지』를 편찬하던 15세기 전반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실록이나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일체보이지 않으며 『실지』보다 약 50년 뒤에 나온『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적 인물조에 약간 보일뿐 성씨조에는 이미 쓰이지 않았다.

토성은 자연적 촌락 공동체로서의‘토(土)’와 혈연적 씨족 집단으로서의‘성(姓)’으로 구성되었다.『실지』에 의하면 토성은 고적(古籍)과 관(關)에 기재되어 있는 성씨를 지칭한다고 하였는데,‘고적’이란 고려초기부터 전해오는 성씨관계 자료이며,‘관’이란 공문서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지리지의 편찬을 위한 작업으로 각 도에서 보고한 성씨관계 기록을 담은 문서이다. 그러므로『실지』소재‘토성’은 당초 토성에서 소멸된 망성(亡姓), 이주성(移住姓)인 래성(來姓)·속성(續姓)등과 다르게 지방전래의 고적에 쓰인 용어로서 토박이 성 즉 고려 초 성씨 분정시에 그곳에 토착하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유력 씨족 또는 그곳을 본관으로 하면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그 군현의 지배 성단이 곧 토성이었던 것이다.

 

이 토성은 고려왕조가 확립된 다음 나타난 사성(賜姓)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 토성의 구분과 용어

토성은 그 출자지(出自地)에 따라

① 주·부·군·현·성

② 촌성

③ 향·소·부곡성으로 구분되고 신분과 거주지 및 현존유무에 따라 인리성(人吏姓) · 백성성(百姓姓) · 차성(次姓) · 래성(來姓) · 입진성(入鎭姓) · 속성(續姓) · 망성(亡姓)등으로 나누어졌다.

• 인리성(人吏姓) - 관아·읍사(邑司) 소재의 지배성단

• 백성성(百姓姓) - 인리성(人吏姓) 다음의 전기촌성(前期村姓)

• 래성(來姓) - 자의로 타지방에서 입래(入來)한 성씨

• 속성(續姓) -『실지』편찬 당시에 비로소 속록(續錄)한 성이라는 뜻

즉, 고적(古籍)에는 없고 고려후기 내지 여말선초에 형성된 성씨  

 

3) 토성의 형성

토성형성의 문제는 그것의 의미와 같이 군현의 구역형성과정과 토착씨족의 발전과정 및 그것의 한성화(漢姓化)의 과정과 상호 연관된다. 형성 시기는 토성의 분포지역이 말하여 주듯이 신라말 고려초기였다.(과거의 신라영역에 한하여 분포되어 있고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이북지역에는 하나도 없다.) 토성의 분정 시기는 비록 고려초라 하더라도 그 토성의 씨족적 유래는 벌써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것에 틀림없다. 그래서 토성 분정 시에는 신라의 진골, 6두품 계층이나 성주·촌주로서 이미 한성(漢姓)을 가진 성단은 그 성단을 가진 채 각기 출신 군현의 토성이 되었고, 아직 한성을 가지지 못한 세력은 자칭성(自稱姓)하거나 사성(賜姓)과 동시에 토성으로 책정된 두 가지 경우가 예상된다.

 

토성의 전신은 신라 이래 각 읍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족단이었고 군현의 전신인 성·촌이 후세 군현으로 개편될 때 그곳을 지배하던 종래의 성주·촌주 들이 후삼국시대에 호족이 되었다. 이들 호족가운데는 종래의 신라 귀성(貴姓)을 가진 자가 많겠고 그 다음은 고려왕조의 성립과 함께 국가로 부터 사성을 받는다든지 또는 중국의 유명성을 모방하여 자칭성을 가짐으로서 태조왕건의 말년에 가서는 각 읍 토성으로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상경 종사한 재경세력이나 재지이족(在地吏族)들은 군현토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4) 토성과 호장(戶長)

◇ 토성과 재지세력

고려 초기에 전국 주 · 부 · 군 · 현과 향 · 소 · 부곡 등 군현과 임내별로 분정된 성씨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 · 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호족이었으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 거주지 별로 토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고급관인을 출신 성씨별로 분석해보면 소수의 중국 · 발해계의 귀화인·유민을 제외하면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태조공신(太祖功臣 :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각기 성과 본관을 분정 또는 하사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 성씨들은 본관을 떠나 일찍이 서울로 진출하여 재경관인이 되거나 그대로 토착한 성씨는 각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향리 · 장리(長吏)층을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러한 군현 성씨의 진출 기반은 강력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적 기반 및 학문적 행정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였다.고려 광종이후에 새로 진출한 성씨들은 대개 군현 향리층의 자제였다.  

 

그 후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방 성씨의 진출이 활발하여 지배층의 저변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추세는 고려후기 또는 조선 초기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집권세력의 변동, 지배세력의 신진대사시 신흥세력은 주로 지방의 토착성씨에서 공급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본관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그 뿌리를 깊게 내리고 향리층끼리 연대를 형성하고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 유이(流移), 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였다.그 결과 기존 토성의 소멸에서 망성(亡姓)이 생기고, 북진정책에 따른 사민(徙民)에서 입진성이 생기고, 지역적인 이동에서 경래성(京來姓) · 래성(來姓) · 입성(入姓)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고려후기 군현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하여 속성(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은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실지』편찬시기)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현 토성에서 나왔다.

 

◇ 토성의 주체 - 호장층(戶長層)

토성의 주체는 후삼국시대 호족의 후예인 호장층 이었으며 고려시대 지방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다. 이러한 각 읍 향리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호장층은 마치 서울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관요직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토착세력은 호장층의 확보여부가 그들 성씨의 세력 소장에 직결되었다. 호장층은 동시에 여초 이래 여말까지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관인을 산출시키는 공급원 역할을 했던 것이며, 그래서 지방향리에서 서울로 진출한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대에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성씨의 시조 가운데에는 호장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시대 군현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사의 구성주체인 호장층이었으며 이들은 그 직역(職役)을 철저히 세습해 나감으로서 고려시대의 읍사향리제는 봉건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군현의 호장 정원과『실지』소재 각 읍 토성 수는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군현 행정의 기초인 읍사는 호장층에 의해 조직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향리 문제는 토성과 읍사(邑司) 문제와를 관련짓지 않고는 그 실체를 밝힐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한편 고려의 향리직제는 문종 5년(1051) 10월에 향리의 직급별 승진체계를 정함으로서 일단 완비되었다. 그 승진 순서는 후단사(後壇史)에서 출발하여 병창사(兵倉史) → 주부군현사(史) → 부병(副兵)·창정(倉正) → 부호정(副戶正) → 호정(戶正) → 병·창정(兵.倉正) → 부호장(副戶長) → 호장(戶長)의 아홉 단계를 밟아 향리의 최고위 지위인 호장에 이르게 되었다.

 

◇ 재지세력의 중앙 진출

고려왕조의 창건과 통일의 주역자가 되었던 지방호족들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재경세력과 토착세력으로 분화되었다. 고려왕조는 이 양자를 연결 또는 조정하는 제도로 사심관(事審官)과 기인(其人)제를 활용하였다. 중앙정부는 중앙집권하에 따라 향직의 개편 외관의 파견 등을 통하여 재지 토성의 군·현 지배권을 수렴하는 동시에 그들의 자제를 중앙관인화 시켜나갔다. 이에 고려초 군·현의 읍사를 장악하고 있던 호장층의 자제들이 계속 상경 종사하면서 새로운 지배세력을 공급해 나갔던 것이다.

 

▷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에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료. 기원은 경순왕이 항복하여 오자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동시에 여러 공신을 각각 출신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 향직을 다스리게 한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사심관은 기인(其人)과 더불어 지방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성종 2년(983) 지방관제가 실시되고 체제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복수의 사심관을 임명하였으며 후대에 갈수록 폐단이 발생하여 충숙왕 5년(1318) 완전 폐지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는 이 사심관제를 답습한 것이다.

 

▷ 기인(其人)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토호세력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있게 한 제도. 왕건의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세력에 대한 포섭조처로서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다. 본래 기인의 임무는 10년 내지 15년간 중앙관아의 이속격으로 잡무에 종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들 지방에 관한 여러 가지 일도 다스렸다. 고려후기에 이르면 일종의 천역제도로 변하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상급향리의 자제는 여전히 거기에서 제외되고 하급향리의 자제만 노역에 사역되었다. 충숙왕 5년(1336)에 혁파되었다가 충혜왕 4년(1343)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질서있게 합리적으로 이용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폐지되었다. 한편, 토성의 중앙 진출 과정은 그 시기와 직역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토성의 성분에 따라서도 상이하였다.

 

우선 시기별로는

① 고려왕조 창건에 적극 참여하여 태조조에 이미 재경 권귀(權貴)가 된 태조공신(三韓功臣) 계열과

② 광종이후 부터 군현의 재지 토성에서 향공(鄕貢) 상경유학 · 시위(侍衛) · 선군(選軍) 등의 수단을 통하여 새로이 상경 종사한 계열로 구분해 볼수 있다.

 

개국공신 2천명을 포함하여 태조공신이 3,200명이나 되며 이는 중앙과 지방 세력을 총망라한 것으로 당시 이들의 거의 모두가 군현토성출신이었음을 감안하면 재지이족의 진출상황은 대단하였으며 이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다음에 광종(950~975), 성종(982~997) 이후에 있어 군현토성의 진출과정은 왕조 창건시와는 많이 달라지게되었다. 왕조 창건의 주체 세력들은 왕권확립과정에서 대부분 도태되고 새로운 관인의 보충문제가 생겼다. 이에는 유교적인 학문소양과 행정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야 가능했으며, 그것이 광종의 과거제 실시와 성종의 적극적인 교육장려 정책에 의해 달성 될 수 있었다.

 

광종9년(958)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향공진사(鄕貢進士)도 선발되었는데 그 선발 주체는 계수관(界首官) 이었고 응시자격은 주로 상급 향리층 자제였다. 당시 과거제도는 군현 토성의 자제를 선발하여 중앙의 새로운 관인화를 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그와 동시에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며 그를 위해 실시한 것이 성종 때의 지방교육 장려책이었다.

 

고려의 과거 제도는 재지 토성 자제들에게 중요한 출사의 하나였고 재경관인 사회에 있어서는 사환(仕宦-벼슬살이) 진출 상 하나의 여과과정이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진출로인 음서(蔭敍)의 경우를 보면 양자가 이론상 별개일 것 같으나 당시 문벌 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자의 관계가 밀접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구분이 애매하였다. 제도적 형식적으로는 관료제적 과거제가 실시되었다하더라도 그 운영은 귀족제적 상황에서 실시되고 있었다고 본다.(더 빠르게 더 높게 승진하기 위하여 학문적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과거였다.) 고려왕조의 발전에 따라 외관(外官)이 증파되고 지방토성의 점진적 흡수에 따라 관인사회의 폭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재경관인 가운데 토성의 수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당대지배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고려 후기 이래 일반화 되었다.

 

고려 전기에 문벌귀족도 그 주류가 군현의 토성에서 유래하였듯이 후기의 신흥사대부도 대부분 토성 향리에서 나왔다.『용재총화』에서“우리나라의 거족(鉅族)은 모두 군현의 토성에서 나왔다.”고 하였듯 조선왕조의 가문들도 대개 고려시대 군현이족의 후예였다.

 

 

* 향공(鄕貢) · 향공진사(鄕貢進士) : 고려시대 계수관시(界首官試)에 합격한 사람에 대한 호칭(사전적 의미는 지방수령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는 뜻) 현종 15년(1024)부터 실시되었으며 주로 지방향리의 자제가 독점하였다.(덕종 때부터는 국자감생과 합쳐 국자감시가 실시됨) 이 시험에 합격하면 향공진사가 되었고 다시 예부시에 합격하면 개경으로 생활근거를옮기고 입사(入仕) 출세의 길에 들어선다. 고려 후기 특히 소백산맥 남쪽의 산간 분지에서 입사한 호장층이 많았다.

* 시위(侍衛) : 임금 또는 왕실을 곁에서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

* 계수관(界首官) : 고려 현종 때 설치된 3경.4도호부.8목의 지방장관을 말한다. 우리나라 독자의 고유한 제도였다. 고려는 중앙의 관할 하에 전국이 교통로나 대읍을 중심으로 몇 개의 큰 단위로 형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다스린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계수관 중심의 체제였다. 주요기능으로는 그 관내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향공 선발의 임무가 있었다. 계수관은 향교를 도회소(都會所)로 삼아 수업과 시험을 치렀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 잡록류의 책. 중종 20년(1525) 경주에서 간행됨.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역사·지리·학문·종교·음악·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