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임씨 득성의 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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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원
1. 역사기록상 초기의 임씨 인물 |
1) 역사기록상 시초의 임씨 추정인물
• 임권(林權)
『삼국사기』(권제1 신라본기 제1) 지마니사금(祗摩尼師今)(재위 112~134) 10년(121)조에“정월에 임권(林權)으로 아찬(阿湌)(제6관등)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 임종(林宗)
『삼국유사』제1권 기이 제1「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조에 진평왕(재위 579~632)때에“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삼국유사』제1권 기이 제1 진덕왕(647~654)조에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나랏일을 논의하는 대신의 이름들이 나오는데“알천공 · 임종(林宗)공 · 술종공 · 호림공 · 염장공 · 유신(庾信)공이 있었다.”고 하면서 임종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 2인에 대해서는
① 임권은 지마니사금(지마왕) 때인데 이때는 성이 없을 때이고
② 임종은 관등이 제1위 관등으로서 진골의 최상위 신분이므로 성은 김(金)일 것이며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또한 이름이다.
『동성고략(東姓考略)』의 기록
조선 정조 때 박경가(朴慶家)의 저서로 알려진 (이희승 저 민중서림 출판 『국어대사전』참조)『동성고략』 (필사본이며『동성고』와『동언고(東言考)』가 같이 전한다고 한다. 규장각 소장본의 표지는『東姓考略』으로 되어 있다.) 을 보면 우리나라의 성을 토성과 화성(華姓)으로 구분하고,「토성」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성씨의 연원을 설명하고 주요 각 성씨의 시조를 나열하고 있는데 임씨의 경우 임권을 그 시조로 하고 있다.
『중국소수민족성씨』의 기록
2011. 1월 중국 북경 소재 민족출판사가 간행한 사전류의 책『중국소수민족성씨』라는 책을 보면“한국 사적(史籍)에 나오는 임씨 인물로 2세기 신라 지마왕 때의 아찬 임권과 7세기 신라 진덕여왕 때의 각간 임종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위 2가지 기록물은 임권과 임종을 우리나라 초기의 임씨 인물로 보고 있다. 참고가 될 만하다.
2) 신라 말기의 임씨 인물
(1) 임언(林彦)
경주인으로 태조왕건의 비인 천안부원부인의 아버지이다. 직함이 태수(太守)로 나온다.(『고려사』열전1 후비1 태조후비 조) 『세종실록지리지』나『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성씨조에는 林氏가 없다. 어떤 연유로 그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을 지가 궁금하다 『삼국사기』경애왕 4년(927) 4월조에 왕봉규(王逢規)가 임언을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고려사』태조 10년(927) 조에도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 측 사료에는『책부원구(冊府元龜)』천성(天成) 2년(927) 4월조에 왕건이 임언을 당에 보냈다고 되어 있고『신5대사(新五代史)』천성 2년(927) 3월조에 신라사신 임언이 왔다고 되어 있다.(『역주삼국사기』「주석」편 참조-한국학중앙연구원 간)
임언은 그 직함이 태수임을 보아 신라 말 외관(外官)으로 강주(康州)(진주)에 있다가 그 지방 호족인 왕봉규와 손을 잡아 크게 활약하였던 것이며 나중에 왕봉규가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이를 계기로 진주일대 남해안의 해상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고 임언은 견당사의 경험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 왕래한 경력으로 미루어 볼 때 입당유학생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 이미 한성(漢姓)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6두품계층은 되었을 것이며 비록 후세의 경주 토성과는 연계되지 않았다하더라도경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한국중세사회사 연구』131쪽 참조)
일본 천태종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신라선편으로 838년 (민애왕) 6월 입당, 산동성 등주의 신라방을 거쳐 9년 6개월 순례여행후 847년 (문성왕9) 12월 신라선편으로 귀국한 후 『입당구법순례행기』 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 책에 엔닌이 만난 신라인 중 (林대사)가 나온다. 임언 또는 임언집안과 관련성이 커보인다.
(2) 고력개국 관료
신라 말 후삼국시기인 918년(경명왕 2) 6월 병진일에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고 국호를「고려」라 하면서 개국한다. 즉위 6일 후 31명의 개국관료를 3등분하여 승진 임명하는데 그중 임씨가 5명이 포함되어 있다.
• 제1부류(장관직 10명)
임명필(林明弼) 한찬(韓粲)에서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희(林曦) 파진찬(波珍粲)에서 병부령(兵部令)으로
• 제2부류(차관직 14명)
임적여(林積璵) 알찬(閼粲)에서 광평시랑(廣平侍郞)
임상난(林相煖) 일길찬(一吉粲)에서 도항사경(都航司卿)
• 제3부류(실무직 7명)
임식(林寔) 순군부낭중에서 광평낭중으로 각각 승진한다.
이들은 신라 말 궁예의 편에 서서 왕건을 도운 인물들인데 그때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889년 견훤과 양길의 반란으로 시작된 신라왕권의 쇠퇴는 892년 견훤, 895년 궁예가 스스로 왕으로 칭하면서 후삼국쟁패시대가 시작된다. 895년 왕건 부자(父子)가 궁예에게 투항하여 왕건은 철원군 태수로 보임 된 후 906년 궁예의 명을 따라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이 지역을 평정하게 되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왕건의 편에 적극 가담하여 왕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진천지방은 후삼국시대 왕건이 청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유금필 등을 보내 주둔케 하였고 성종 때 자사(刺史)를 설치하는 등 쟁패지로서 중시되었고 토성(土姓)의 수도 보통 군현보다 많은 10개성이나 될 정도로 지방 세력이 강했던 곳이다. 임명필(林明弼)은 그의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된 숙목부인 임씨의 아버지 명필(名必)과 동일 인물로 짐작되는 사람이며, 임희(林曦)는 2대 혜종의 제1비인 의화왕후 임씨의 아버지 임희와 동일인물로 진천의 제1 실력자로 추정된다.임명필은 실질적인 군사지휘권을 가진 순군부령이고 임희는 군사에 관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병부령으로서 진천임씨 일족이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5명의 임씨들은 모두 진천(鎭川)임씨로서 한 집안사람으로 보인다.(『한국중세사회사연구』128쪽, 186쪽 참조 )
그런데 이들 진천 임씨들이 그 출신성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하여 그 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을 형성하고 나라의 병권을 맡길 정도로 왕건의 신임을 얻은 힘 있는 호족이 되었을까하는 점은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을 가진 사람이 흔치 않던 시절 비교적 일찍 임성(林姓)을 가지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이들은 신라 왕경 경주지방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이른 시기에 성을 가질 정도로 강력한 세력가가문이었음에 비추어 신라 말 후삼국 시기 성씨 취득의 일반론에 따라 유추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즉, 왕경에서 지방으로 이주한 고위신분의 집안이거나 지방에서 스스로 자성한 호족으로서 임성(林姓)은 가까운 선조(고위신분 또는 세력형성가)에서 자칭하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임성(林姓)의 인물들이 신라말기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결국 임성(林姓)이 신라하대에 생겨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선산임씨의 득성 연유도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성의 보급과정에 비추어 본 득성의 연원 |
그럼 선산임씨는 어떻게 하여 임성(林姓)을 갖게 되었을까. 고대 중국에서처럼 토템적 신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박(朴)·석(昔)·김(金)의 신라 종성(宗姓)이 갖고 있는 득성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6부성(정·모·배·이·최·설)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임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보급역사에 비추어 그 득성 연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평택임씨 계열은 중국임씨가 그 연원이라 하는데 우리 선산임씨는 그 시조가 엄연히 신라 말 경순왕 때의 중랑장 임양저공이기 때문에 우리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의 관계
성자(姓字) 林은 한성(漢姓)이므로 신라시대(특히 하대) 당나라와의 교류에서 임성(林姓)의 성자가 들어온 것이다.(임언林彦의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林의 성자를 택한 것은 그 어떤 연유가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의 추리가 곧 우리의 득성 연원을 추리하는 과정이다.
◇ 한성(漢姓)의 수용 배경
신라하대 성씨가 보급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왕성인 김성(金姓)을 제외한 다른 한성은 나당관계에서 견당(遣唐)사신·견당유학·숙위(宿衛)학생·입당수도승·기타 무역 관계 인사 등이 한성을 갖게 된 예에서 보듯이 우리의 시조가문은 당나라와의 교류에 직접 참가하였거나 이들로부터 그 성자를 전해 들었을 것이 임성(林姓)을 갖게 되는 배경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 『삼국사기』 한성의 예
『삼국사기』「신라본기」와 열전「궁예·견훤」전에 의거 원성왕 이후 신라 말까지 등장하는 한성의 인물을 성씨별로 분류해보면 신라의 9성(3성과 6성)외에 장(張)(장보고·장웅·장변·장건영·장분), 왕(王)(왕거인·왕봉규·왕건·왕충 등), 백(白)(백영·백탁), 임(林)(임언), 양(楊)(양지), 송(宋)(송함홍), 허(許)(허원), 강(康)(궁예의 처)등이 보일 뿐이다.(『한국중세사회사연구』118쪽 참조)
◇ 시조의 신분으로 본 성의 취득 배경
우리나라에서 한성(漢姓)의 수용과정은 왕실 → 귀족 → 일반지배층 → 양민·평민 순으로 보급되어 갔는데 우리의 시조는 그 신분이 중랑장(中郞將)의 벼슬과 경순왕의 손녀사위라는 왕실과의 혼척관계임에 비추어 임양저공의 선조는 귀족 내지 6두품의 후예이다. 따라서 그 선조들은 비교적 일찍 저성(著姓)인 임성(林姓)을 스스로 칭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득성의 단서 |
1) 임권(林權)의 예?
『동성고략』에서 우리나라 임씨의 시조로 임권을 들고 있는데 그의 벼슬이 제6관등인 아찬으로 나오는 점으로 보아 개연성이 크다. 비록『삼국사기』의 기록이 지마왕 10년(121)의 일이므로 그 당시는 성이 없을 때 이므로 林을 성자로 할 수는 없지만 그 후대 언젠가에 후손이 조상의 이름자를 성자로 삼았을 개연성마저 부인될 수는 없다고 본다면『동성고략』 저자의 추론이나『중국소수민족성씨』의 소개가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2) 임종(林宗)의 후예?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임종은 진평왕(579~632) 및 진덕(여)왕(647~654)때의 인물인데 그 직위가 제1관등인 각간(이벌찬)으로 이는 진골에 해당하며 같이 언급되고 있는 유신(庾信)공 등 인물이 모두 성자가 빠져있다. 만약 성을 붙인다면 金성이 될 것이므로 그 개연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그의 자가 양자이고 시대적으로도 신라중기 성을 막 취할 시기인 점에 비추어 그 후손 중 누군가가 독자성을 취하면서 성자를 林자로 택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3) 임언(林彦)과의 연관성
역사 기록에 나오는 임씨 인물로서는 임양저(林良貯)공과 시기나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신라 말 경주인으로 입당유학생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그의 가문은 6두품계층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경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비추어 신라 말 경주에 임씨성이 존재하였음은 확실하며 시기적으로나 임언의 신분, 행적으로 볼 때 우리의 시조가문과 임언의 가문과는 같거나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계림(鷄林)의 林자는?
그냥 단순한 연상(聯想)으로서 계림의 林자와 林성과는 연관이 없을까 상상해본다. 계림은 원래 시림(始林)이라 부르던 곳인데 4대 탈해왕 9년(65) 3월 이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왕이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왕이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있었다.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다.
자람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독(金櫝)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김(金)씨라 하고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여 국호로 삼았다.(『삼국사기』「탈해왕」조 참조 ) 김알지는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며 그 7세손 미추니사금(미추왕)이 13대 임금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르며 김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임양저공의 선조가 성자(姓字)를 정할 때에 林성이 중국의 성자로 비교적 저성(著姓)인데다가 林자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신라의 성지인 계림의 林자도 있는 터라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보는 것이다.(경순왕이 계림근처에 살았다)
4. 결론 |
성을 갖게 되는 역사와 더불어 초기 林성의 실제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선산임씨의 시조 임양저공의 선조가 林성을 갖게 된 여러 단서들을 추적하여 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林성을 득성하게 되었는지를 유추해 보면 다음의 경우일 것이다.
① 임권(林權)·임종(林宗)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
② 임언(林彦)과는 같은 집안이거나 가까운 집안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
③ 시조의 집안은 왕경 경주에서 귀족 내지 6두품의 가문인데 어느 선조가 분파하여 독립가문으로 되면서 林성을 자칭하였을 개연성도 있다.
- 임용원
1. 역사기록상 초기의 임씨 인물 |
1) 역사기록상 시초의 임씨 추정인물
• 임권(林權)
『삼국사기』(권제1 신라본기 제1) 지마니사금(祗摩尼師今)(재위 112~134) 10년(121)조에“정월에 임권(林權)으로 아찬(阿湌)(제6관등)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 임종(林宗)
『삼국유사』제1권 기이 제1「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조에 진평왕(재위 579~632)때에“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삼국유사』제1권 기이 제1 진덕왕(647~654)조에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나랏일을 논의하는 대신의 이름들이 나오는데“알천공 · 임종(林宗)공 · 술종공 · 호림공 · 염장공 · 유신(庾信)공이 있었다.”고 하면서 임종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 2인에 대해서는
① 임권은 지마니사금(지마왕) 때인데 이때는 성이 없을 때이고
② 임종은 관등이 제1위 관등으로서 진골의 최상위 신분이므로 성은 김(金)일 것이며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또한 이름이다.
『동성고략(東姓考略)』의 기록
조선 정조 때 박경가(朴慶家)의 저서로 알려진 (이희승 저 민중서림 출판 『국어대사전』참조)『동성고략』 (필사본이며『동성고』와『동언고(東言考)』가 같이 전한다고 한다. 규장각 소장본의 표지는『東姓考略』으로 되어 있다.) 을 보면 우리나라의 성을 토성과 화성(華姓)으로 구분하고,「토성」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성씨의 연원을 설명하고 주요 각 성씨의 시조를 나열하고 있는데 임씨의 경우 임권을 그 시조로 하고 있다.
『중국소수민족성씨』의 기록
2011. 1월 중국 북경 소재 민족출판사가 간행한 사전류의 책『중국소수민족성씨』라는 책을 보면“한국 사적(史籍)에 나오는 임씨 인물로 2세기 신라 지마왕 때의 아찬 임권과 7세기 신라 진덕여왕 때의 각간 임종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위 2가지 기록물은 임권과 임종을 우리나라 초기의 임씨 인물로 보고 있다. 참고가 될 만하다.
2) 신라 말기의 임씨 인물
(1) 임언(林彦)
경주인으로 태조왕건의 비인 천안부원부인의 아버지이다. 직함이 태수(太守)로 나온다.(『고려사』열전1 후비1 태조후비 조) 『세종실록지리지』나『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성씨조에는 林氏가 없다. 어떤 연유로 그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을 지가 궁금하다 『삼국사기』경애왕 4년(927) 4월조에 왕봉규(王逢規)가 임언을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고려사』태조 10년(927) 조에도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국 측 사료에는『책부원구(冊府元龜)』천성(天成) 2년(927) 4월조에 왕건이 임언을 당에 보냈다고 되어 있고『신5대사(新五代史)』천성 2년(927) 3월조에 신라사신 임언이 왔다고 되어 있다.(『역주삼국사기』「주석」편 참조-한국학중앙연구원 간)
임언은 그 직함이 태수임을 보아 신라 말 외관(外官)으로 강주(康州)(진주)에 있다가 그 지방 호족인 왕봉규와 손을 잡아 크게 활약하였던 것이며 나중에 왕봉규가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이를 계기로 진주일대 남해안의 해상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고 임언은 견당사의 경험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 왕래한 경력으로 미루어 볼 때 입당유학생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 이미 한성(漢姓)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6두품계층은 되었을 것이며 비록 후세의 경주 토성과는 연계되지 않았다하더라도경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한국중세사회사 연구』131쪽 참조)
일본 천태종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신라선편으로 838년 (민애왕) 6월 입당, 산동성 등주의 신라방을 거쳐 9년 6개월 순례여행후 847년 (문성왕9) 12월 신라선편으로 귀국한 후 『입당구법순례행기』 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 책에 엔닌이 만난 신라인 중 (林대사)가 나온다. 임언 또는 임언집안과 관련성이 커보인다.
(2) 고력개국 관료
신라 말 후삼국시기인 918년(경명왕 2) 6월 병진일에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고 국호를「고려」라 하면서 개국한다. 즉위 6일 후 31명의 개국관료를 3등분하여 승진 임명하는데 그중 임씨가 5명이 포함되어 있다.
• 제1부류(장관직 10명)
임명필(林明弼) 한찬(韓粲)에서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희(林曦) 파진찬(波珍粲)에서 병부령(兵部令)으로
• 제2부류(차관직 14명)
임적여(林積璵) 알찬(閼粲)에서 광평시랑(廣平侍郞)
임상난(林相煖) 일길찬(一吉粲)에서 도항사경(都航司卿)
• 제3부류(실무직 7명)
임식(林寔) 순군부낭중에서 광평낭중으로 각각 승진한다.
이들은 신라 말 궁예의 편에 서서 왕건을 도운 인물들인데 그때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889년 견훤과 양길의 반란으로 시작된 신라왕권의 쇠퇴는 892년 견훤, 895년 궁예가 스스로 왕으로 칭하면서 후삼국쟁패시대가 시작된다. 895년 왕건 부자(父子)가 궁예에게 투항하여 왕건은 철원군 태수로 보임 된 후 906년 궁예의 명을 따라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이 지역을 평정하게 되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왕건의 편에 적극 가담하여 왕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진천지방은 후삼국시대 왕건이 청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유금필 등을 보내 주둔케 하였고 성종 때 자사(刺史)를 설치하는 등 쟁패지로서 중시되었고 토성(土姓)의 수도 보통 군현보다 많은 10개성이나 될 정도로 지방 세력이 강했던 곳이다. 임명필(林明弼)은 그의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된 숙목부인 임씨의 아버지 명필(名必)과 동일 인물로 짐작되는 사람이며, 임희(林曦)는 2대 혜종의 제1비인 의화왕후 임씨의 아버지 임희와 동일인물로 진천의 제1 실력자로 추정된다.임명필은 실질적인 군사지휘권을 가진 순군부령이고 임희는 군사에 관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병부령으로서 진천임씨 일족이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5명의 임씨들은 모두 진천(鎭川)임씨로서 한 집안사람으로 보인다.(『한국중세사회사연구』128쪽, 186쪽 참조 )
그런데 이들 진천 임씨들이 그 출신성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하여 그 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을 형성하고 나라의 병권을 맡길 정도로 왕건의 신임을 얻은 힘 있는 호족이 되었을까하는 점은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을 가진 사람이 흔치 않던 시절 비교적 일찍 임성(林姓)을 가지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이들은 신라 왕경 경주지방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이른 시기에 성을 가질 정도로 강력한 세력가가문이었음에 비추어 신라 말 후삼국 시기 성씨 취득의 일반론에 따라 유추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즉, 왕경에서 지방으로 이주한 고위신분의 집안이거나 지방에서 스스로 자성한 호족으로서 임성(林姓)은 가까운 선조(고위신분 또는 세력형성가)에서 자칭하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임성(林姓)의 인물들이 신라말기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결국 임성(林姓)이 신라하대에 생겨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선산임씨의 득성 연유도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성의 보급과정에 비추어 본 득성의 연원 |
그럼 선산임씨는 어떻게 하여 임성(林姓)을 갖게 되었을까. 고대 중국에서처럼 토템적 신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박(朴)·석(昔)·김(金)의 신라 종성(宗姓)이 갖고 있는 득성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6부성(정·모·배·이·최·설)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임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보급역사에 비추어 그 득성 연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평택임씨 계열은 중국임씨가 그 연원이라 하는데 우리 선산임씨는 그 시조가 엄연히 신라 말 경순왕 때의 중랑장 임양저공이기 때문에 우리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의 관계
성자(姓字) 林은 한성(漢姓)이므로 신라시대(특히 하대) 당나라와의 교류에서 임성(林姓)의 성자가 들어온 것이다.(임언林彦의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林의 성자를 택한 것은 그 어떤 연유가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의 추리가 곧 우리의 득성 연원을 추리하는 과정이다.
◇ 한성(漢姓)의 수용 배경
신라하대 성씨가 보급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왕성인 김성(金姓)을 제외한 다른 한성은 나당관계에서 견당(遣唐)사신·견당유학·숙위(宿衛)학생·입당수도승·기타 무역 관계 인사 등이 한성을 갖게 된 예에서 보듯이 우리의 시조가문은 당나라와의 교류에 직접 참가하였거나 이들로부터 그 성자를 전해 들었을 것이 임성(林姓)을 갖게 되는 배경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 『삼국사기』 한성의 예
『삼국사기』「신라본기」와 열전「궁예·견훤」전에 의거 원성왕 이후 신라 말까지 등장하는 한성의 인물을 성씨별로 분류해보면 신라의 9성(3성과 6성)외에 장(張)(장보고·장웅·장변·장건영·장분), 왕(王)(왕거인·왕봉규·왕건·왕충 등), 백(白)(백영·백탁), 임(林)(임언), 양(楊)(양지), 송(宋)(송함홍), 허(許)(허원), 강(康)(궁예의 처)등이 보일 뿐이다.(『한국중세사회사연구』118쪽 참조)
◇ 시조의 신분으로 본 성의 취득 배경
우리나라에서 한성(漢姓)의 수용과정은 왕실 → 귀족 → 일반지배층 → 양민·평민 순으로 보급되어 갔는데 우리의 시조는 그 신분이 중랑장(中郞將)의 벼슬과 경순왕의 손녀사위라는 왕실과의 혼척관계임에 비추어 임양저공의 선조는 귀족 내지 6두품의 후예이다. 따라서 그 선조들은 비교적 일찍 저성(著姓)인 임성(林姓)을 스스로 칭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득성의 단서 |
1) 임권(林權)의 예?
『동성고략』에서 우리나라 임씨의 시조로 임권을 들고 있는데 그의 벼슬이 제6관등인 아찬으로 나오는 점으로 보아 개연성이 크다. 비록『삼국사기』의 기록이 지마왕 10년(121)의 일이므로 그 당시는 성이 없을 때 이므로 林을 성자로 할 수는 없지만 그 후대 언젠가에 후손이 조상의 이름자를 성자로 삼았을 개연성마저 부인될 수는 없다고 본다면『동성고략』 저자의 추론이나『중국소수민족성씨』의 소개가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2) 임종(林宗)의 후예?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임종은 진평왕(579~632) 및 진덕(여)왕(647~654)때의 인물인데 그 직위가 제1관등인 각간(이벌찬)으로 이는 진골에 해당하며 같이 언급되고 있는 유신(庾信)공 등 인물이 모두 성자가 빠져있다. 만약 성을 붙인다면 金성이 될 것이므로 그 개연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그의 자가 양자이고 시대적으로도 신라중기 성을 막 취할 시기인 점에 비추어 그 후손 중 누군가가 독자성을 취하면서 성자를 林자로 택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3) 임언(林彦)과의 연관성
역사 기록에 나오는 임씨 인물로서는 임양저(林良貯)공과 시기나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신라 말 경주인으로 입당유학생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그의 가문은 6두품계층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경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비추어 신라 말 경주에 임씨성이 존재하였음은 확실하며 시기적으로나 임언의 신분, 행적으로 볼 때 우리의 시조가문과 임언의 가문과는 같거나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계림(鷄林)의 林자는?
그냥 단순한 연상(聯想)으로서 계림의 林자와 林성과는 연관이 없을까 상상해본다. 계림은 원래 시림(始林)이라 부르던 곳인데 4대 탈해왕 9년(65) 3월 이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왕이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왕이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있었다.왕이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다.
자람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독(金櫝)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김(金)씨라 하고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여 국호로 삼았다.(『삼국사기』「탈해왕」조 참조 ) 김알지는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며 그 7세손 미추니사금(미추왕)이 13대 임금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르며 김씨가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임양저공의 선조가 성자(姓字)를 정할 때에 林성이 중국의 성자로 비교적 저성(著姓)인데다가 林자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신라의 성지인 계림의 林자도 있는 터라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보는 것이다.(경순왕이 계림근처에 살았다)
4. 결론 |
성을 갖게 되는 역사와 더불어 초기 林성의 실제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선산임씨의 시조 임양저공의 선조가 林성을 갖게 된 여러 단서들을 추적하여 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林성을 득성하게 되었는지를 유추해 보면 다음의 경우일 것이다.
① 임권(林權)·임종(林宗)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
② 임언(林彦)과는 같은 집안이거나 가까운 집안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
③ 시조의 집안은 왕경 경주에서 귀족 내지 6두품의 가문인데 어느 선조가 분파하여 독립가문으로 되면서 林성을 자칭하였을 개연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