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毅味) 조(祖)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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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필
그간 말썽이 있었던「의미(毅味)」조(祖)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말씀 올려 볼까 합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조부님께서 8림(八林)과「의(毅)자 미(味) . 만(蔓)자 . 진(珍)자 . 간(幹)자……」하고 우리 선산임씨의 상계 대 휘(諱)를 마치 역대왕명을 외우듯 배우고 익혀서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중에 출입하게 된 후「의미」조에 대한 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소아산(小牙山)의 휘 종(宗) 비문을 찬(撰)하고 을해보(1995)의「문헌편」에 관계하게 됨에 따라 여러 가지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갑론을박 여러 번의 종론(宗論)을 거쳐 금번 을해보에서는「의미」조를「설(說)」로 하기로 결론지었음은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 구태여「설」이라고 한 것은 차후 만일 정확한 근거자료가 나온다면 언제든지 정사(正史)로 환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송합니다마는 다시 한 번「의미」조의 설정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① 우리 관(貫)이「이중득관(二重得貫)」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이 생긴다는 점
② 그 설정(5회『병진보』1916)의 배경인 소위「팔림설(八林說)」이 논의 당초부터 이미 붕괴되었다는 점
③ 그 설정의 근거라는 문건이 애매하고 불합리한 점
④ 자칫하면「선산관의 유지보전」이 어려워 질수 있다는 점(실관 할 수 있는 위기)등입니다.
이를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善山林氏」는 이제까지「신라 말에 양저(良貯)의 자손이 선산(즉 평성<坪城>)지방에 투거(投居)」됨으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선산임씨」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고려 말에「의미(毅味)」가 갑자기 새로 나타나서,「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우리가「선산」을 득관 했다고 주장한다면
① 어느 쪽이 진정한 득관설이라는 말입니까.
② 『병진보』(1916 일제강점기)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의미」를 알고「선산임씨」를 칭하였으며, 충헌공(백령)·석천공(억령)이「의미」를 알고 시권(試券)에「선산인」이라고 썼다는 말입니까.그 분들이 쓴「선산관」은 가상이나 오류라는 말입니까.
③ 아이들, 후세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어떻게 가르치란 말입니까.
「의미(毅味)」를「선산군(善山君)」이라고 하여「새 관조(貫祖)」로 주장함은
① 우리 관의 유래를 둘로 갈라놓는「이중득관설」을 의미하며
② 후손에게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설명하기 곤란한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편의적이고 일시적인 미봉책은 이와 같이 반드시 허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여기서 우리 족보에「상계대(上系代) 및 의미(毅味)조의 수용 경위」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 선림보(善林譜)에서는 1회보부터 4회보까지 <양저(良貯)공을 시조로 만(蔓)공을 중시조>로 하고 두 분의 사이는 <실전이(失傳而) 부지기대(不知幾代)>라 하여 상계대를 공백으로 하여 왔습니다.
다만, 제3회『을묘보』에서「양저」다음으로「무(珷).우(祐)」를 재서(載書)하였다가 삭제하는 등 일시혼란을 겪는 것을 보아 아마 그때까지는 상계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5회『병진보』(1916)에 이르러,
① 상계대를 <온(蘊)을 시조로 팔급(八及)을 중시조로 삽입하고 양저(良貯)를 2세 - 만(蔓)을 12세로 강등 계대(繼代)하여 일계(一系) 체계로 재정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평택임씨의 1회『갑신보』(1764-우리 병술보보다 2년 빠름)에서 이미 상계대(팔급~언수)가 일계로 재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5회 병진보가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후술 임용원의 논고문 참조)
②「언수(彦脩)」의 자(子)로 <성(成)·제(齊)·견(堅)·세(世)·선(先)·자(自)·의(毅)·계(季)>의 8미(八味)를 설정하였는데 그 제7자를「의미」라 하여「선산임씨의 관조」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선산 임씨는 평택임씨의 산하(傘下)에 들어간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계의 체계화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소위 문화정책의 일환이라 하여 족보의 편찬사업을 장려하였고 민간은 민간대로 <뭉쳐야 산다>고 하는 독립·통합의 차원에서 성관의 통합 즉 이제까지의 분파·분적으로 부터 각 파의 합파
즉,「환적(還籍)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때 금속활자체의 신보가 다수 인쇄 발간되었으며 이것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책에는 놀랍게도「鍾路警察署印」(종로경찰서인)이 찍혀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목적과는 달리 일제는 <조선인사찰용>으로 족보의 통합 발간을 장려하였던 것입니다.(출판물 검열을 통하여) 이리하여 평택임씨 중 성미(成味)파인 나주(羅州)향선재(享先齋)파(평택임씨의 대본산격)의 강력한 주도아래 서울에서 전 임씨가 모임을 갖고(단 나주임씨는 불참) 위와 같이 8미(八味)를 정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 善林은 그 세가 약하여 일곱번째(제7자)로 배정되었다고 합니다. 8미(八味)는 8림설(八林說)에 입각한 것으로, 원래「八」자(字)는 그 끝이 갈라져 무한대로 커지고 또 둘로 나누어지는 숫자(짝수-우수偶數)중에서 가장 큰 숫자이므로「8림」이라 하면「모든 임씨가 다 포함되고 무한히 퍼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八」자를 좋아하는 중국인의 풍습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8림(八林)」즉「8미(八味)」는, 임병운(林炳云)씨(『임씨요람』의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모임은 당초부터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선미(先味)」는 그 부(父)가 역사기록이 뚜렷하여(순창관조 임중연)「언수」의 자가 될수 없고「자미(自味), 의미(毅味)」에 대해서도 적어도 <중시조>라고 하는 분이 해당 관 구보에 전연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季味는 당초부터 季美로 味자가 될수 없음-임용원 주)
「의미(毅味)」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① 이와 같이「8미(八味)의 일원」으로서「의미」가 팔미자체가 붕괴된 마당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되며
② 또한 전체 임씨를 망라한다는 뜻에서 인지「의미」의 경우는「봉 선산군·진천군」으로 하여 진천임씨의 관조까지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시기적으로도 고려말기에는 아직「선산」의 지명이 생기기 전이므로 역사적으로「선산군」에 봉해질 수 없고, 적어도「선산·진천」의 양군(兩君)에 봉해졌다면 공신(功臣)이거나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음직 한데 그 역사기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양군으로 봉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④ 이와 같이「진천군」에도 봉해져 그 관조까지 겸하게 되다보니 그 손자에 「임희(林曦)」를 두게 되었습니다.( 예-선산임씨『정사보』) 그러나 이분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공신(건국시 병부령)으로 고려 2대 혜종(912~945)의 장인이 되는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이므로「의미」보다 4~5백 년 전의 분이며 진짜 진천관(鎭川貫)의 시조인 것입니다. 관조를 마구잡이로 배분하다보니 500년 앞선 선인(先人)을 그 손자로 둔갑시키는 등(시간개념이 없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⑤ 이상에서 소위「8림의 구성(구상)」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조잡하며 허구였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즉 역사를 순리에 따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아래 의도적으로 조작하였다는 냄새가 물씬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에「의미(毅味)」조의 출전(出典) 근거를 살피고자 합니다.
상계대와「의미」를 처음으로 재서(載書)한『병진보』(1916)에서는 그 출전 근거를 전적으로「석천선생수록가승(石川先生手錄家乘)」에 돌리고 있습니다. 즉,『병진보』발문(跋文)(임영한 발)에서는
① 강진(康津) 백양리(白羊里) 종인(宗人)으로부터 석천선생이 수록(手錄)한 가승(家乘)을 얻어 보니
② 시조는 온(蘊), 중조는 팔급(八及).언수(彦脩)에 8군(君)이 있어 그중 선산군 의미(毅味)가 석천공의 8세조가 된다는 점.
③ 석천선생은 덕업과 문장이 훌륭하므로 착오가 없을 것이니 이로서 조계(祖系)의 계통을 바로 하였다는 주장입니다.(『을해보』41쪽 참조 )
필자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본 결과「강진 백양리 종인」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석천선생 수록가승」을 찾게 되었습니다. 강진 백양리는 현 강진군 병영면(兵營面) 삭양리(朔羊里)로서 장흥군에 인접한 작은 마을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삭둔리(朔屯里)와 백양리(白羊里)가 합쳐진 것입니다. 이 마을에 우정(遇貞)의 직계 손(8세손) 승서(昇瑞)가 입촌하여(묘가 장흥에 있음), 그 후손들이 장흥·강진(병영)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데 이 분들이 바로 그「백양리 종인」들인 것입니다.
한편 종중 어느 분으로부터『선산임씨세계단(善山林氏世系單)(경자庚子)』(1900) 1권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병진보』에서 말하는「강진백양리 종인들의 가승」이라는 것을 그 후에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세계단(경자)』에는(그 표지와 내용 일부 - 별첨참조)
① 시조 온(蘊)·중시조 팔급(八及)·2세 양저(良貯)…으로 상계대가 수직으로 명료하게 재서(載書)되어 있고
② 10세 언수(彦脩)에 8자가 있어 그 제7자인 의미(毅味)가 11세 선산군(善山君)(여기에는 진천군의 병기가 없음)으로 되어있고
③ 발문에 <석천공 이상과 이하의 호적(戶籍)과 세승(世乘)이 강진 백양리 족인가(族人家)에서 현발(現發)하여 3백년 만에 비로소 세승을 알게 되었다.>고 발(跋)하고 있습니다.
④ 그런데 이『세계단』의 손록(孫錄)편에, 억령(億齡)의 장자인 찬(澯)은 「무후(無后)」인데 그전 족보에는 전연 볼 수 없었던 <극성(克星)·극진(克辰)·극렬(克列)> 세분을 마치 실존(實存)한 것처럼 새로 설정 삽입하여 놓았고, (이것은 병술·신묘·병진·병신의 각 족보를 비교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⑤ 그『세계단』의 말미에「후록(後錄)」이라고 쓴 쪽지 1장을 덧붙여서 위의 「극진(克辰)」(새로 창조, 첨가한 분)의 후계로, 우정(遇貞)계인 <영수(永壽)…승서(昇瑞)>를 그대로 이기(移記)해 놓았습니다. 즉,「억령(億齡) - 찬(澯) - 극진(克辰) - 영수(永壽) - 흥경(興慶) - 성휘(成輝) - 봉서(鳳瑞)
• 승서(昇瑞)」로 연결하여 석천공의 직계 후손인 것처럼 조작해 놓은 것입니다.「극진」은 가공인물이며,「영수…승서」가 백양리 거주 우정(遇貞) 계하의 후손들입니다.
⑥ 그러나 이분들(「영수…승서」) 즉 백양리 종인들이 그 후의 족보에도 계속「우정(遇貞)의 직손(直孫)」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병진보는 물론 역대의 족보를 보면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계단에「후록」1쪽을 슬쩍 붙여서 그렇게 조작한 것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우정」후계의「극진(克震)」을 글자 하나를 고쳐서 「극진(克辰)」으로 하고 있는 점입니다.
-오래전입니다만 서울의 선산임씨 친목모임인 소림회(素林會)모임에서 회원인 임도상(林道相)씨(강진 삭망리 출신.지금은 고인)에게 어느 파인가 물었더니 어렸을 적에는「석천공 후손」이라고 배웠는데 지금 족보를 보니「우정 손」이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와 같이 실제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니 놀랍기만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보듯이『선산임씨세계단(善山林氏世系單)(경자-1900)』은
① 『병진보』(1916)의 발문에서 말하는「강진 백양리 종인들이 소지한 가승」이라는 것이 확실하며
② 또한, <석천선생이 수기(手記)하신 가승이므로 착오가 없을 것이니 믿을지어다>하고, <병진보에 상계대와 의미(毅味)를 수용하게 된 확실한 근거 즉 출전(出典)>이라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어떤 연유로 그때까지 상계대를 몰랐으며, 어째서「의미(毅味)」가 새로이 관조(貫祖)가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하나도 없이 오직 그 근거를 석천선생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며
④ 이를 증(證)한다고 벽지에 따로 떨어져 세거하고 있는 강진 백양리 종인들(우정의 손)을 우정(遇貞)손(孫)에서 떼어내어 억령(億齡)손(孫)으로 둔갑시켜 그 출전 근거를 조작한 선인들의 처사는 참으로 놀랍고도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외에도『둔암선생집(遯庵先生集)(임천령선생문집)』(1916년 간-임의식 소장)(둔암은 천령공의 아호)에서 천령선생의 행장에「비조(鼻祖) 팔급(八及)…양저(良貯)…선산관 의미(毅味)…」의 기록이 있음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 행장의 이 상계대기록은『팽성임씨(부안·울릉파)보』와 거의 일치하나 하대에 가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행장에서도「의미(毅味)를 선산관의 관조(貫祖)」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이 같은 해 발간된『병진보』(1916)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끝으로 전국 10대성의 하나인 林氏(2000년 통계자료-762,767명으로 10위의 인구수)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평택·나주임씨의 세력 비교 및 선산임씨의 위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조선조 林氏의 문과급제자 총 124인중「나주」가 51인(41.1%)인데 비하여「평택」은 18인(14.5%)의 절대적 열세라는 점-「선산」은 6인으로서 나주·평택에 이어 당당한 제3위에 위치
② 이분들의 최종관직(당상관이상만)을 비교하면, 「나주」가 18인인데 비하여「평택」은 11인(단 국조방목에 없는 분을 빼면 5인)으로 역시 열세이며
③ 더군다나 그 직위에 있어 「나주」는 우의정 1인, 판서 4인 등인데,「평택」은 참판·관찰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④ 한편 각종 인명사전을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평택임씨의 열세가 숫자로 나타납니다.
평택임씨는 이와 같은 열세의 초조함을 메꾸기 위한 수단(?)인지는 몰라도, 선산임씨를 비롯한 일부 임씨의 고명한 인사를 자기들의 실세로 마구 편입 내지 인용하고 있습니다.
① 중앙일보 발간(1989.2.28 제1판)의『성씨의 고향 - 한국성씨대백과』를 보면 우리의 억령·백령 조가「평택임씨」편「씨족사의 개요」에 올라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선조라고 버젓이 올린 것입니다.(임천임씨의 벌열에는 구령(2등공신)·억령(호당)이 자기들 선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② 그 외 각종 일간지의「성씨소개 씨리즈」의“평택임씨편”에 의례히 억령·백령 두 분이 자기네 선조라고 게재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을 자기들 선조라고 받들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마는,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선산관적(善山貫籍)」을 송두리째 빼버린다는 사실입니다.
③ 대한민국족보학회 임씨문헌편찬위원회에서 1988. 12. 20 발간한『임씨숭조문헌보감(林氏崇祖文獻譜鑑)』이라는 책자에 보면 군소관향들은 빠짐없이 있으면서도 선산임씨는 아예 빼버리고 없습니다. 그러고는 평택임씨 손록에 의미(毅味) 계하로 만(蔓) - 진(珍) - 간(幹) - 득무(得茂)를 올려놓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그들의 세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칫 조상과 실관(失貫)(?)의 위기를 기우(杞憂)해 봅니다. 가령 우리 관을 뺐다고 항의했을 때 <언수(彦脩)의 제7자인데 아버지의 관(貫)을 따른 것이 무슨 잘못이냐>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의미(毅味)」를 우리 善林의 중시조(관조)로 곧바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며「설(說)」로 남기게 된 마지막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자료인 김종직의『이존록』기록에 고려전기의 선산호장「임은영(林銀永)」이 나오고 고려 말에는 김종직의 부 김숙자의 족숙으로 스승인 임재(林載)가 나옵니다.『고려사』에도 공민왕 때「임영화(林永和)·보검(宝劍)」형제의 이야기가 나오며,『일선지』에도 고려 때「임자후(林自栩)」라는 인물의 기록이 있음으로 볼 때 임만(林蔓) 이전의 선산임씨 인물들의 존재가 명백한 이상 임의미(林毅味)조 이야기는 이제 설로서도 그 뜻이 없다할 것입니다.(왜냐하면 가공된 설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임종필
그간 말썽이 있었던「의미(毅味)」조(祖)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말씀 올려 볼까 합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조부님께서 8림(八林)과「의(毅)자 미(味) . 만(蔓)자 . 진(珍)자 . 간(幹)자……」하고 우리 선산임씨의 상계 대 휘(諱)를 마치 역대왕명을 외우듯 배우고 익혀서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중에 출입하게 된 후「의미」조에 대한 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소아산(小牙山)의 휘 종(宗) 비문을 찬(撰)하고 을해보(1995)의「문헌편」에 관계하게 됨에 따라 여러 가지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갑론을박 여러 번의 종론(宗論)을 거쳐 금번 을해보에서는「의미」조를「설(說)」로 하기로 결론지었음은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 구태여「설」이라고 한 것은 차후 만일 정확한 근거자료가 나온다면 언제든지 정사(正史)로 환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송합니다마는 다시 한 번「의미」조의 설정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말씀드린다면,
① 우리 관(貫)이「이중득관(二重得貫)」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이 생긴다는 점
② 그 설정(5회『병진보』1916)의 배경인 소위「팔림설(八林說)」이 논의 당초부터 이미 붕괴되었다는 점
③ 그 설정의 근거라는 문건이 애매하고 불합리한 점
④ 자칫하면「선산관의 유지보전」이 어려워 질수 있다는 점(실관 할 수 있는 위기)등입니다.
이를 차례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善山林氏」는 이제까지「신라 말에 양저(良貯)의 자손이 선산(즉 평성<坪城>)지방에 투거(投居)」됨으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선산임씨」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고려 말에「의미(毅味)」가 갑자기 새로 나타나서,「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우리가「선산」을 득관 했다고 주장한다면
① 어느 쪽이 진정한 득관설이라는 말입니까.
② 『병진보』(1916 일제강점기)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의미」를 알고「선산임씨」를 칭하였으며, 충헌공(백령)·석천공(억령)이「의미」를 알고 시권(試券)에「선산인」이라고 썼다는 말입니까.그 분들이 쓴「선산관」은 가상이나 오류라는 말입니까.
③ 아이들, 후세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어떻게 가르치란 말입니까.
「의미(毅味)」를「선산군(善山君)」이라고 하여「새 관조(貫祖)」로 주장함은
① 우리 관의 유래를 둘로 갈라놓는「이중득관설」을 의미하며
② 후손에게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설명하기 곤란한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편의적이고 일시적인 미봉책은 이와 같이 반드시 허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여기서 우리 족보에「상계대(上系代) 및 의미(毅味)조의 수용 경위」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 선림보(善林譜)에서는 1회보부터 4회보까지 <양저(良貯)공을 시조로 만(蔓)공을 중시조>로 하고 두 분의 사이는 <실전이(失傳而) 부지기대(不知幾代)>라 하여 상계대를 공백으로 하여 왔습니다.
다만, 제3회『을묘보』에서「양저」다음으로「무(珷).우(祐)」를 재서(載書)하였다가 삭제하는 등 일시혼란을 겪는 것을 보아 아마 그때까지는 상계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5회『병진보』(1916)에 이르러,
① 상계대를 <온(蘊)을 시조로 팔급(八及)을 중시조로 삽입하고 양저(良貯)를 2세 - 만(蔓)을 12세로 강등 계대(繼代)하여 일계(一系) 체계로 재정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평택임씨의 1회『갑신보』(1764-우리 병술보보다 2년 빠름)에서 이미 상계대(팔급~언수)가 일계로 재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5회 병진보가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후술 임용원의 논고문 참조)
②「언수(彦脩)」의 자(子)로 <성(成)·제(齊)·견(堅)·세(世)·선(先)·자(自)·의(毅)·계(季)>의 8미(八味)를 설정하였는데 그 제7자를「의미」라 하여「선산임씨의 관조」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선산 임씨는 평택임씨의 산하(傘下)에 들어간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계의 체계화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소위 문화정책의 일환이라 하여 족보의 편찬사업을 장려하였고 민간은 민간대로 <뭉쳐야 산다>고 하는 독립·통합의 차원에서 성관의 통합 즉 이제까지의 분파·분적으로 부터 각 파의 합파
즉,「환적(還籍)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때 금속활자체의 신보가 다수 인쇄 발간되었으며 이것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책에는 놀랍게도「鍾路警察署印」(종로경찰서인)이 찍혀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목적과는 달리 일제는 <조선인사찰용>으로 족보의 통합 발간을 장려하였던 것입니다.(출판물 검열을 통하여) 이리하여 평택임씨 중 성미(成味)파인 나주(羅州)향선재(享先齋)파(평택임씨의 대본산격)의 강력한 주도아래 서울에서 전 임씨가 모임을 갖고(단 나주임씨는 불참) 위와 같이 8미(八味)를 정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 善林은 그 세가 약하여 일곱번째(제7자)로 배정되었다고 합니다. 8미(八味)는 8림설(八林說)에 입각한 것으로, 원래「八」자(字)는 그 끝이 갈라져 무한대로 커지고 또 둘로 나누어지는 숫자(짝수-우수偶數)중에서 가장 큰 숫자이므로「8림」이라 하면「모든 임씨가 다 포함되고 무한히 퍼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八」자를 좋아하는 중국인의 풍습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8림(八林)」즉「8미(八味)」는, 임병운(林炳云)씨(『임씨요람』의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모임은 당초부터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선미(先味)」는 그 부(父)가 역사기록이 뚜렷하여(순창관조 임중연)「언수」의 자가 될수 없고「자미(自味), 의미(毅味)」에 대해서도 적어도 <중시조>라고 하는 분이 해당 관 구보에 전연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季味는 당초부터 季美로 味자가 될수 없음-임용원 주)
「의미(毅味)」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① 이와 같이「8미(八味)의 일원」으로서「의미」가 팔미자체가 붕괴된 마당에, 그대로 존속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되며
② 또한 전체 임씨를 망라한다는 뜻에서 인지「의미」의 경우는「봉 선산군·진천군」으로 하여 진천임씨의 관조까지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시기적으로도 고려말기에는 아직「선산」의 지명이 생기기 전이므로 역사적으로「선산군」에 봉해질 수 없고, 적어도「선산·진천」의 양군(兩君)에 봉해졌다면 공신(功臣)이거나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음직 한데 그 역사기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양군으로 봉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④ 이와 같이「진천군」에도 봉해져 그 관조까지 겸하게 되다보니 그 손자에 「임희(林曦)」를 두게 되었습니다.( 예-선산임씨『정사보』) 그러나 이분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공신(건국시 병부령)으로 고려 2대 혜종(912~945)의 장인이 되는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이므로「의미」보다 4~5백 년 전의 분이며 진짜 진천관(鎭川貫)의 시조인 것입니다. 관조를 마구잡이로 배분하다보니 500년 앞선 선인(先人)을 그 손자로 둔갑시키는 등(시간개념이 없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⑤ 이상에서 소위「8림의 구성(구상)」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조잡하며 허구였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즉 역사를 순리에 따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아래 의도적으로 조작하였다는 냄새가 물씬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에「의미(毅味)」조의 출전(出典) 근거를 살피고자 합니다.
상계대와「의미」를 처음으로 재서(載書)한『병진보』(1916)에서는 그 출전 근거를 전적으로「석천선생수록가승(石川先生手錄家乘)」에 돌리고 있습니다. 즉,『병진보』발문(跋文)(임영한 발)에서는
① 강진(康津) 백양리(白羊里) 종인(宗人)으로부터 석천선생이 수록(手錄)한 가승(家乘)을 얻어 보니
② 시조는 온(蘊), 중조는 팔급(八及).언수(彦脩)에 8군(君)이 있어 그중 선산군 의미(毅味)가 석천공의 8세조가 된다는 점.
③ 석천선생은 덕업과 문장이 훌륭하므로 착오가 없을 것이니 이로서 조계(祖系)의 계통을 바로 하였다는 주장입니다.(『을해보』41쪽 참조 )
필자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본 결과「강진 백양리 종인」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석천선생 수록가승」을 찾게 되었습니다. 강진 백양리는 현 강진군 병영면(兵營面) 삭양리(朔羊里)로서 장흥군에 인접한 작은 마을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삭둔리(朔屯里)와 백양리(白羊里)가 합쳐진 것입니다. 이 마을에 우정(遇貞)의 직계 손(8세손) 승서(昇瑞)가 입촌하여(묘가 장흥에 있음), 그 후손들이 장흥·강진(병영)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데 이 분들이 바로 그「백양리 종인」들인 것입니다.
한편 종중 어느 분으로부터『선산임씨세계단(善山林氏世系單)(경자庚子)』(1900) 1권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병진보』에서 말하는「강진백양리 종인들의 가승」이라는 것을 그 후에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세계단(경자)』에는(그 표지와 내용 일부 - 별첨참조)
① 시조 온(蘊)·중시조 팔급(八及)·2세 양저(良貯)…으로 상계대가 수직으로 명료하게 재서(載書)되어 있고
② 10세 언수(彦脩)에 8자가 있어 그 제7자인 의미(毅味)가 11세 선산군(善山君)(여기에는 진천군의 병기가 없음)으로 되어있고
③ 발문에 <석천공 이상과 이하의 호적(戶籍)과 세승(世乘)이 강진 백양리 족인가(族人家)에서 현발(現發)하여 3백년 만에 비로소 세승을 알게 되었다.>고 발(跋)하고 있습니다.
④ 그런데 이『세계단』의 손록(孫錄)편에, 억령(億齡)의 장자인 찬(澯)은 「무후(無后)」인데 그전 족보에는 전연 볼 수 없었던 <극성(克星)·극진(克辰)·극렬(克列)> 세분을 마치 실존(實存)한 것처럼 새로 설정 삽입하여 놓았고, (이것은 병술·신묘·병진·병신의 각 족보를 비교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⑤ 그『세계단』의 말미에「후록(後錄)」이라고 쓴 쪽지 1장을 덧붙여서 위의 「극진(克辰)」(새로 창조, 첨가한 분)의 후계로, 우정(遇貞)계인 <영수(永壽)…승서(昇瑞)>를 그대로 이기(移記)해 놓았습니다. 즉,「억령(億齡) - 찬(澯) - 극진(克辰) - 영수(永壽) - 흥경(興慶) - 성휘(成輝) - 봉서(鳳瑞)
• 승서(昇瑞)」로 연결하여 석천공의 직계 후손인 것처럼 조작해 놓은 것입니다.「극진」은 가공인물이며,「영수…승서」가 백양리 거주 우정(遇貞) 계하의 후손들입니다.
⑥ 그러나 이분들(「영수…승서」) 즉 백양리 종인들이 그 후의 족보에도 계속「우정(遇貞)의 직손(直孫)」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병진보는 물론 역대의 족보를 보면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계단에「후록」1쪽을 슬쩍 붙여서 그렇게 조작한 것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우정」후계의「극진(克震)」을 글자 하나를 고쳐서 「극진(克辰)」으로 하고 있는 점입니다.
-오래전입니다만 서울의 선산임씨 친목모임인 소림회(素林會)모임에서 회원인 임도상(林道相)씨(강진 삭망리 출신.지금은 고인)에게 어느 파인가 물었더니 어렸을 적에는「석천공 후손」이라고 배웠는데 지금 족보를 보니「우정 손」이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와 같이 실제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니 놀랍기만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보듯이『선산임씨세계단(善山林氏世系單)(경자-1900)』은
① 『병진보』(1916)의 발문에서 말하는「강진 백양리 종인들이 소지한 가승」이라는 것이 확실하며
② 또한, <석천선생이 수기(手記)하신 가승이므로 착오가 없을 것이니 믿을지어다>하고, <병진보에 상계대와 의미(毅味)를 수용하게 된 확실한 근거 즉 출전(出典)>이라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어떤 연유로 그때까지 상계대를 몰랐으며, 어째서「의미(毅味)」가 새로이 관조(貫祖)가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하나도 없이 오직 그 근거를 석천선생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며
④ 이를 증(證)한다고 벽지에 따로 떨어져 세거하고 있는 강진 백양리 종인들(우정의 손)을 우정(遇貞)손(孫)에서 떼어내어 억령(億齡)손(孫)으로 둔갑시켜 그 출전 근거를 조작한 선인들의 처사는 참으로 놀랍고도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외에도『둔암선생집(遯庵先生集)(임천령선생문집)』(1916년 간-임의식 소장)(둔암은 천령공의 아호)에서 천령선생의 행장에「비조(鼻祖) 팔급(八及)…양저(良貯)…선산관 의미(毅味)…」의 기록이 있음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 행장의 이 상계대기록은『팽성임씨(부안·울릉파)보』와 거의 일치하나 하대에 가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행장에서도「의미(毅味)를 선산관의 관조(貫祖)」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이 같은 해 발간된『병진보』(1916)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끝으로 전국 10대성의 하나인 林氏(2000년 통계자료-762,767명으로 10위의 인구수)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평택·나주임씨의 세력 비교 및 선산임씨의 위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조선조 林氏의 문과급제자 총 124인중「나주」가 51인(41.1%)인데 비하여「평택」은 18인(14.5%)의 절대적 열세라는 점-「선산」은 6인으로서 나주·평택에 이어 당당한 제3위에 위치
② 이분들의 최종관직(당상관이상만)을 비교하면, 「나주」가 18인인데 비하여「평택」은 11인(단 국조방목에 없는 분을 빼면 5인)으로 역시 열세이며
③ 더군다나 그 직위에 있어 「나주」는 우의정 1인, 판서 4인 등인데,「평택」은 참판·관찰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④ 한편 각종 인명사전을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평택임씨의 열세가 숫자로 나타납니다.
평택임씨는 이와 같은 열세의 초조함을 메꾸기 위한 수단(?)인지는 몰라도, 선산임씨를 비롯한 일부 임씨의 고명한 인사를 자기들의 실세로 마구 편입 내지 인용하고 있습니다.
① 중앙일보 발간(1989.2.28 제1판)의『성씨의 고향 - 한국성씨대백과』를 보면 우리의 억령·백령 조가「평택임씨」편「씨족사의 개요」에 올라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선조라고 버젓이 올린 것입니다.(임천임씨의 벌열에는 구령(2등공신)·억령(호당)이 자기들 선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② 그 외 각종 일간지의「성씨소개 씨리즈」의“평택임씨편”에 의례히 억령·백령 두 분이 자기네 선조라고 게재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을 자기들 선조라고 받들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마는,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선산관적(善山貫籍)」을 송두리째 빼버린다는 사실입니다.
③ 대한민국족보학회 임씨문헌편찬위원회에서 1988. 12. 20 발간한『임씨숭조문헌보감(林氏崇祖文獻譜鑑)』이라는 책자에 보면 군소관향들은 빠짐없이 있으면서도 선산임씨는 아예 빼버리고 없습니다. 그러고는 평택임씨 손록에 의미(毅味) 계하로 만(蔓) - 진(珍) - 간(幹) - 득무(得茂)를 올려놓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그들의 세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칫 조상과 실관(失貫)(?)의 위기를 기우(杞憂)해 봅니다. 가령 우리 관을 뺐다고 항의했을 때 <언수(彦脩)의 제7자인데 아버지의 관(貫)을 따른 것이 무슨 잘못이냐> 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의미(毅味)」를 우리 善林의 중시조(관조)로 곧바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며「설(說)」로 남기게 된 마지막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자료인 김종직의『이존록』기록에 고려전기의 선산호장「임은영(林銀永)」이 나오고 고려 말에는 김종직의 부 김숙자의 족숙으로 스승인 임재(林載)가 나옵니다.『고려사』에도 공민왕 때「임영화(林永和)·보검(宝劍)」형제의 이야기가 나오며,『일선지』에도 고려 때「임자후(林自栩)」라는 인물의 기록이 있음으로 볼 때 임만(林蔓) 이전의 선산임씨 인물들의 존재가 명백한 이상 임의미(林毅味)조 이야기는 이제 설로서도 그 뜻이 없다할 것입니다.(왜냐하면 가공된 설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