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에서의 성씨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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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원

1. 중국에서의 성씨의 연원

1) 중국의 성씨

우리나라의 성씨제도는 중국의 성씨제도에서 도입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중국에서의 성씨의 개념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필자가 이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먼저‘성씨’라는 용어의 개념부터 알아보려고 여러 책자를 살펴보았으나 명쾌히 그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 2011.5 북경소재 신세계출판사에서 간행된『중국성씨대전』이라는 책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책 제1부「중화성씨소원(溯源)」에 성씨의 개념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를 보니 그 뜻을 명확히 알 수가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여 옮긴다.(溯源-사물의 근원을 구명함)

 

◇ 성(姓) - 모계혈연의 표지(標志)

“성(姓)”은 그 글자가“종녀종생(從女從生)”(『설문해자』 의 풀이 『설문해자』는 후한 때 허신(許愼)이 만든 최초의 옥편) 즉“여자에게서 태어남”을 뜻하여 여성을 시조로 하는 공동 족속(族屬)의 표지(標志)가“姓”이었다. 즉,“姓”의 근원은 모계사회에 있으며 같은 성은 같은 모계혈연관계를 나타내었다. 그래서 중국최초의 성들은 대부분“여(女)”방(旁)이다. 예를 들어 강(姜), 요(姚), 사(姒), 규(嬀), 영(嬴)등이다.

씨(氏) - 부권가장제(父權家長制)의 수령 호칭

“씨”가 등장한 것은“성(姓)”보다 뒤로서, 부계(父系)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이다. 즉 부권가장제가 확립되었을 때 가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예가 “염제(炎帝) 열산(列山)씨, 강(姜)성” (염제 열산씨 - 염제 신농(神農)씨가 원래 열산(호북성)에서 일어났다. 그래서『춘추좌씨 전』에“열산씨”라는 씨명이 나온다. 열산의 별명이 여산(廬山)으로 여산씨라고도 한다.) , “황제(黃帝) 헌원(軒轅)씨, 희(姬)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공동선조인 염황2제는 당초 부락(部落) 또는 부락연맹에서 기래(起來)된 모계혈연조직을 나타내고, 그 성을 강(姜), 희(姬)라 했다. 여기에서「부권가장제의 수령」을 씨(氏)로 칭하였는데 그것이「열산」,「헌원」이었다. 성과 씨가 엄격히 구별되었음에도 같이 사용된 것은 모권제가 부권제로 넘어가면서이다. 모계사회의 영향은 같이 남아 있다가 춘추전국 이후 점점 사라지게 된다.

 

2) 성의 기원과 발전

성의 기원은 시조의 근원과 토템숭배의 문자화

성씨는 인류초기의 부락에서 그 싹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의 근원은 모계씨족사회의「토템」숭배에 있고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토템」숭배-자연물상, 동식물, 일월성신, 산천풍속, 풍운뇌전 등을 숭배의 대상으로 함. 씨족의 혈통적 표지로도 삼음) 원시씨족부락 및 그 시조의 근원을 나타내는 토템적 신화전설의 예를 보면,

 

• 염제 신농씨 - 그 어머니 안등(安登)이 신룡의 감응을 받아 강수(姜水)가에서 낳았다하여 성을 강(姜)이라 함. (안등(安登) -『사기』및『제왕세기』에는 여등(女登)으로 되어있다.)

• 황제 헌원씨 - 어머니 부보(附寶)가 큰 들에서 뇌성이 울리고 북극성에 휘감겨 잉태하였는데, 헌원(軒轅)의 언덕에서 낳고 희수(姬水)가에서 키웠다고 하여 성을 희(姬)로 함.

• 하(夏)의 시조 우(禹)는,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서 신의 구슬(신주神珠) 율무(의의 薏苡)로 바뀌었는데 잉태하여 우를 낳았다. 이에 하나라 사람들은 율무를 토템으로 삼고 성을“사(姒)”(苡의 변형)로 하였다.

• 상(商)의 시조 설(契)은,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비(玄鳥현조)의 알을 삼키고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이에 제비를 토템으로 삼고 성을“자(子)”(알을 말함)로 하였다.

•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곰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이 태어났는데 이에 주나라 사람들은 곰을 토템으로 삼았다. 성을“희(姬)”로 하였는데 이는 곰발자국모양의 글자인 臣에 女방을 붙인 것이다.

 

모계씨족사회에서는“사람들(民人)은 그 어머니를 알 뿐 아버지는 모른다.”하여 세계(世系)를 계산할 때는 모계를 따랐으며 어머니를 따라 성을 얻었다. 『좌전(左傳)』에“인생사성(因生賜姓)”즉“태어나면서 (어머니의)성을 받는다.”라고 하고『설문해자』의 해석에는“姓”은“종생종녀(從生從女)”라고 하고 있다.

고대 여러 성에“女”자가 있음은 이를 나타낸다. 같은 성의 성원(成員)은 같은 모계시조로서 공동혈연관계이다. 이로 인해 선진(先秦) 시기에 동성(同姓)은 결혼을 금하였는데, 후세에“씨동성부동자 혼인가통, 성동씨부동자 혼인불가통(氏同姓不同者 婚姻可通, 姓同氏不同者 婚姻不可通)”은 여기에 근원이 있다.

 

3) 씨(氏)의 생성변화

씨(氏)는 부족의 표지(標志)요 종족(宗族)의 휘호(徽号)

씨는 고대 선진(先秦)시기(BC 8~7세기) 부족의 표지요 종족의 휘호를 칭하였다.“씨(氏)”자를 갑골문자에서 해석하면“목본(木本)”의 뜻이다. 즉 식물의“근(根)”이다. 그리하여 후세에“심근(尋根)”이라는 말은 그 성씨의 뿌리를 찾는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8년』에“성”과“씨”의 관계와 구별에 관한 글이 있다. “천자건덕(天子建德), 인생이사성(因生以賜姓), 조지토이명지씨(胙之土而命之氏), 제후이자위시(諸侯以字爲諡), 인이위족(因以爲族) ; 관유세공(官有世功), 즉유관족(則有官族), 읍역여지(邑亦如之)”라 하고 있다. “천자가 덕이 있는 사람을 제후(諸侯)로 삼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성을 하사하고,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주었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하였으며, 제후가 자(字)를 시호로 하면 이로서 족호로 하였다. 공이 있어 벼슬을 받으면 벼슬명을 족호로 하는 것이나 읍호로 그러하는 것이나 모두 같다.”즉, 천자가 제후를 분봉한 후 출생을 근거로 성을 주고 분봉토지로서 씨를 삼았다. 제후들이 자(字)를 지어 시호로 하면 후인들이 족호로 삼거나, 관직명, 봉지의 읍호를 족호로 짓는 것 등 이러한 족호들이 모두“씨”였다.

 

씨는 성의 지족(支族)

“씨”는“성”보다 늦게 나왔는데“성”의 지족(支族)이라 할 수 있다. “씨”가 나오게 된 것은 부계씨족사회에 있다. 주(周)대 분봉제도 때 성행하게 된다. 정초(鄭樵)의『통지(通志)·씨족략·서』에 이르기를“3대(하·상·주) 이전에는 성과 씨는 구분되어 남자는 씨를 칭하고 부인은 성을 칭하였다. 씨는 귀천을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귀한 사람은 씨가 있고 천한 사람은 이름은 있으되 씨는 없었다. 혼인을 할 때에도 구별이 있었다. 씨는 같으나 성이 다른 사람과는 혼인이 가능했으나 씨가 달라도 성이 같으면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씨”는 동성부락의 명칭에서 부락의 수령을 가리키는 존호로 바뀜

최초로“씨”는 동성부락의 명칭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차 부락의 수령을 가리키는 존호로 바뀌게 된다. 전설 중에 부계사회의 영웅인물 칭호에 “씨”를 붙이는 것은 존칭으로서 이다.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씨, 태호(太昊) 복희씨, 소호(少昊) 금천(金天)씨 등이 그 예이다. 선진시기“씨”는 대개 부족을 나타내거나 종지(宗支)를 나타내는 휘호(徽号)였고 사회지위의 존비(尊卑)를 나타내는 귀천(貴賤)의 표지였다.

 

◇ “씨”는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고 부권제(父權制)의 확립으로 발전

“씨”로서 귀천을 구별하는 풍상(風尙-모습)은 부계씨족사회화 되면서 선진시기까지 상당히 성행하였는데“동성이씨(同姓異氏), 일성다씨(一姓多氏)”의 사회형국이 되기도 하였다. 마치 염제 신농씨가 본래 강(姜)성 부락의 시조였는데, 그 후예가 나뉘어 열산(列山)씨, 축융(祝融)씨 및 제(齊) 여(呂) 신(申) 허(許) 등의 씨족으로 분지(分支)되고, 황제 헌원씨는 희(姬)성 부락의 시조였는데 서로 다른 아들 25명이 있었고 12씨족으로 나뉘었다. 태호 복희씨, 소호 금천씨는 본시 동방 봉성(鳳姓) 부락의 수령으로 새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다. 그 후예들이 번연(繁衍)하였는데 봉조(鳳鳥)씨, 현조(玄鳥)씨, 단조(丹鳥)씨, 청조(靑鳥)씨, 구(鳩)씨, 상구(爽鳩)씨, 백조(伯趙)씨 및“오치(五雉)”“구호(九扈)”등 24개“이조명관(以鳥名官)”의 씨족이었다. 부권제(父權制)가 확립됨으로써「씨」가 형성되었는데 모계씨족이 점차 부계씨족으로 대체된 것이다. 소유적 혈연관계가 부계로 확실히 인식됨에 따라 모계씨족이 해체되고 부계씨족이 흥기하게 되어 성씨의 변화과정을 이루며 이 또한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것이다.

 

하(夏)대의 성씨정황은 문헌의 부족으로 고고학적 발현에 기대지만 시조 우(禹)가 희(姬)성이고, 그 후 분봉으로 씨부족이 나라로 되어, 하후(夏后)씨 유호(有扈)씨 유남(有男)씨 짐심(斟尋)씨 동성(彤城)씨, 포(褒)·비(費)·기(杞)·증(繒)·신(辛)·막(莫)씨 등 10여개 성씨가 되었다. 상(商)나라는 전형적 노예제 왕조인데 “조토명씨(胙土命氏)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받았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함) ”의 원칙이 정식으로 이루어져 성씨가 생산된다. 상은 적자(嫡子)가 왕위계승권을 갖는데 서자(庶子)는 “조토명씨(胙土命氏)”의 분봉권익을 가졌다. 공훈대신(功勳大臣), 부용(附庸)부락(큰 나라에 딸려 붙어서 지내는 작은 나라), 봉사(封賜)에 상응하는 후국(侯國), 채읍(采邑)(식읍食邑) 등으로 성씨가 대폭 증가되어“8백 제후”가 있었다하며『사기』,『세본』등 문헌에 나오는 성씨만도 수십여 개이다.(대부분 나라 이름을「씨」로 함)

 

“백성(百姓)”의 원래 뜻

『상서(尙書)』「반경(盤庚)」(상나라 19대 임금)조에 보면 은(殷)·상(商)의 귀족대성(大姓) 즉 지배층을 총칭하여“백성(百姓)”이라 불렀는데 이는 씨족사회 시기의 호칭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사회역사적 발전과 왕조의 바뀜이 빈번하여지자 귀족계층이 원봉읍과 지위를 잃게 되어 보통 서민(庶民)이 되었다. 그런데 원래 성씨는 그대로 갖고 있었으므로 후세에 역대의 서민을 총칭하는 뜻으로 바뀌게 된다. “백성”이 일반국민의 뜻으로 쓰이게 된 전고(典故)가 여기에 있다.

 

봉건적 종법제(宗法制)와 「씨」의 분화

주(周)나라는 봉방건국(封邦建國)과 엄격한 등급의 종법제(이를「봉건적종법제」라 함)를 서로 긴밀히 연결시켰다. 주천자(周天子)는 자칭 상천(上天)의 장자(長子)로서 천자로 칭하고 상천의 토지와 신민을 사급(賜給)하였다고 하였다.(적장자가 부친의 대를 이어 대종(大宗)이 되고 동생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주왕조 전체가 한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 즉 혈연의 위계질서 확립이 종법제이다) 주(周)나라 초에는 분봉된 제후가 71국(왕의 직할지(왕기王畿)를 제외하고는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 부름)이고 그중 동성인 희성(姬姓)의 제후가 40국, 이성(異姓)제후가 31국이었다. 주천자는 대종(大宗)으로 천하를 공주(共主)하고 각 제후 및 자국의 토지 안에서 분봉된 채지(采地)나 식읍(食邑)을 가진 동성 또는 이성의 경대부는 그 나라의 군(君)을 종주(宗主)로 하여 차례로 서민에까지 분봉하는 제도였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 한층 한 층씩 분봉되고 하나의 성(姓)이 여러 지계(支系)로 세분되어 새로운 씨족이 여러 갈래로 많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의 성(姓)이 여러 개의 씨로 나누이고 심지어 한사람이 여러 씨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천자는 주(周)를 씨로 하고, 수봉제후는 나라(國)를 씨로 하니 새로운 씨족이 형성되게 된다. 그 외에도 읍을 씨로, 작(爵)을 씨로, 족(族)을 씨로, 기(技)를 씨로, 시(諡)를 씨로 하는 등 여러 가지였다. 이렇게 출신가문과 사회지위에 따라“씨(氏)”가 표명됨으로 인하여“씨명귀천(氏明貴賤)”의 사회기능이 생겨나게 된다.

 

4) 성씨의 합일

“성별혼인(姓別婚姻)”,“씨명귀천(氏明貴賤)”과 같이 성과 씨를 구별하던 제도는 춘추시대(BC 8세기~5세기)까지도 변하지 않았는데 춘추말기 전국시대(BC 453 혹은 BC 403~)에 이르러 사회가 급격히 변동되는 여건 속에서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먼저 주천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들의 힘이 무력화됨에 따라“조토명씨(胙土命氏)”의 실력을 갖출 수 없게 된다. 제후들이 왕을 칭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할거하면서 영웅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러한 틈에 옛 대족(大族)의 집안은 나라가 멸하고 봉읍을 잃고 있을 곳도 없어지게 되어 서민으로 내려앉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혼란 속에“씨명귀천(氏明貴賤)”의 사회적 기능이 없어지고 현실적 의의가 끝나게 됨에 따라 성과 씨의 구별이라는 제도에도 변화 조짐이 일어나게 된다.

 

진(秦)이 6국을 멸한 후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가 시행되는데 그전의 많은 왕손, 귀족들은 서민과 죄인으로 된다. 진나라 말 한고조 유방, 회남왕 영포, 회음후 한신, 무양후 번쾌 등과 같이 진의 폭정에 대항하여 농민봉기가 크게 일어남에 따라 평민백성, 심지어 형노(刑奴), 백정까지도 왕이나 제(帝)로 칭하고 공(公)이나 후(侯)의 열에 오르게 된다.이러한 사회적 대변동의 결과 옛 귀족이 서민이 되고 어제의 평민이 새로운 귀족으로 상승하기도 하였다.

 

이에“조토명씨”의 종법(宗法)제도는 설 자리를 잃게 되고“씨명귀천”의 사회적 기능도 따라서 소실된다. 이에 종족(宗族)의 표지로서 만들어졌던“성”과“씨”는 이를 구별할 실질적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근근이 개인을 나타내거나 가족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부호로서 성씨로 하게 된다. 이로서 진한(秦漢)이후 성과 씨가 혼용되거나 성과 씨가 합하여 하나의 호칭으로 되게 된 것이다.정초(鄭樵)의『통지·씨족략·서』에도“3대(하·상·주)에는 성을 둘로 나누어 남자는 씨로 칭하고 부인은 성을 칭하였다. 씨로서 귀천을 구별하고 성으로서 혼인의 구별을 삼았다.

 

3대(하·상·주)후에 성과 씨의 둘이 하나로 합쳐져서 모두 혼인의 구별로 삼고 지망(地望)이 명천(明賤)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성씨의 혼용이나 합일은 한대(漢代)에 시작되는데 정식 문헌으로는 사마천의『사기』가 맨 처음으로 추정되는데 진시황을“성조씨(姓趙氏)”, 한고조 유방을“성유씨(姓劉氏)”라고 칭하고 있다. 진한(秦漢)이후 성씨를 구별하지 않거나 성만 부르거나 씨만 부르거나 혹은 성과 씨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성씨가 합일된 결과 원래 귀천을 나타내던“씨”가 원시적“성”으로 융입되게 된다.

 

 

* 『설문해자』- 후한 때 허신(許愼)이 만든 최초의 옥편

* 염제 열산씨 - 염제 신농(神農)씨가 원래 열산(호북성)에서 일어났다. 그래서『춘추좌씨전』에“열산씨”라는 씨명이 나온다. 열산의 별명이 여산(廬山)으로 여산씨라고도 한다.

* 안등(安登) -『사기』및『제왕세기』에는 여등(女登)으로 되어있다.

* 조토명씨-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받았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함'

 - 임용원

1. 중국에서의 성씨의 연원

1) 중국의 성씨

우리나라의 성씨제도는 중국의 성씨제도에서 도입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중국에서의 성씨의 개념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필자가 이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먼저‘성씨’라는 용어의 개념부터 알아보려고 여러 책자를 살펴보았으나 명쾌히 그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 2011.5 북경소재 신세계출판사에서 간행된『중국성씨대전』이라는 책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책 제1부「중화성씨소원(溯源)」에 성씨의 개념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를 보니 그 뜻을 명확히 알 수가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여 옮긴다.(溯源-사물의 근원을 구명함)

 

◇ 성(姓) - 모계혈연의 표지(標志)

“성(姓)”은 그 글자가“종녀종생(從女從生)”(『설문해자』 의 풀이 『설문해자』는 후한 때 허신(許愼)이 만든 최초의 옥편) 즉“여자에게서 태어남”을 뜻하여 여성을 시조로 하는 공동 족속(族屬)의 표지(標志)가“姓”이었다. 즉,“姓”의 근원은 모계사회에 있으며 같은 성은 같은 모계혈연관계를 나타내었다. 그래서 중국최초의 성들은 대부분“여(女)”방(旁)이다. 예를 들어 강(姜), 요(姚), 사(姒), 규(嬀), 영(嬴)등이다.

◇ 씨(氏) - 부권가장제(父權家長制)의 수령 호칭

“씨”가 등장한 것은“성(姓)”보다 뒤로서, 부계(父系)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이다. 즉 부권가장제가 확립되었을 때 가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예가 “염제(炎帝) 열산(列山)씨, 강(姜)성” (염제 열산씨 - 염제 신농(神農)씨가 원래 열산(호북성)에서 일어났다. 그래서『춘추좌씨 전』에“열산씨”라는 씨명이 나온다. 열산의 별명이 여산(廬山)으로 여산씨라고도 한다.) , “황제(黃帝) 헌원(軒轅)씨, 희(姬)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공동선조인 염황2제는 당초 부락(部落) 또는 부락연맹에서 기래(起來)된 모계혈연조직을 나타내고, 그 성을 강(姜), 희(姬)라 했다. 여기에서「부권가장제의 수령」을 씨(氏)로 칭하였는데 그것이「열산」,「헌원」이었다. 성과 씨가 엄격히 구별되었음에도 같이 사용된 것은 모권제가 부권제로 넘어가면서이다. 모계사회의 영향은 같이 남아 있다가 춘추전국 이후 점점 사라지게 된다.

 

2) 성의 기원과 발전

◇ 성의 기원은 시조의 근원과 토템숭배의 문자화

성씨는 인류초기의 부락에서 그 싹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의 근원은 모계씨족사회의「토템」숭배에 있고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토템」숭배-자연물상, 동식물, 일월성신, 산천풍속, 풍운뇌전 등을 숭배의 대상으로 함. 씨족의 혈통적 표지로도 삼음) 원시씨족부락 및 그 시조의 근원을 나타내는 토템적 신화전설의 예를 보면,

 

• 염제 신농씨 - 그 어머니 안등(安登)이 신룡의 감응을 받아 강수(姜水)가에서 낳았다하여 성을 강(姜)이라 함. (안등(安登) -『사기』및『제왕세기』에는 여등(女登)으로 되어있다.)

• 황제 헌원씨 - 어머니 부보(附寶)가 큰 들에서 뇌성이 울리고 북극성에 휘감겨 잉태하였는데, 헌원(軒轅)의 언덕에서 낳고 희수(姬水)가에서 키웠다고 하여 성을 희(姬)로 함.

• 하(夏)의 시조 우(禹)는,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서 신의 구슬(신주神珠) 율무(의의 薏苡)로 바뀌었는데 잉태하여 우를 낳았다. 이에 하나라 사람들은 율무를 토템으로 삼고 성을“사(姒)”(苡의 변형)로 하였다.

• 상(商)의 시조 설(契)은,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비(玄鳥현조)의 알을 삼키고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이에 제비를 토템으로 삼고 성을“자(子)”(알을 말함)로 하였다.

•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곰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이 태어났는데 이에 주나라 사람들은 곰을 토템으로 삼았다. 성을“희(姬)”로 하였는데 이는 곰발자국모양의 글자인 臣에 女방을 붙인 것이다.

 

모계씨족사회에서는“사람들(民人)은 그 어머니를 알 뿐 아버지는 모른다.”하여 세계(世系)를 계산할 때는 모계를 따랐으며 어머니를 따라 성을 얻었다. 『좌전(左傳)』에“인생사성(因生賜姓)”즉“태어나면서 (어머니의)성을 받는다.”라고 하고『설문해자』의 해석에는“姓”은“종생종녀(從生從女)”라고 하고 있다.

고대 여러 성에“女”자가 있음은 이를 나타낸다. 같은 성의 성원(成員)은 같은 모계시조로서 공동혈연관계이다. 이로 인해 선진(先秦) 시기에 동성(同姓)은 결혼을 금하였는데, 후세에“씨동성부동자 혼인가통, 성동씨부동자 혼인불가통(氏同姓不同者 婚姻可通, 姓同氏不同者 婚姻不可通)”은 여기에 근원이 있다.

 

3) 씨(氏)의 생성변화

◇ 씨(氏)는 부족의 표지(標志)요 종족(宗族)의 휘호(徽号)

씨는 고대 선진(先秦)시기(BC 8~7세기) 부족의 표지요 종족의 휘호를 칭하였다.“씨(氏)”자를 갑골문자에서 해석하면“목본(木本)”의 뜻이다. 즉 식물의“근(根)”이다. 그리하여 후세에“심근(尋根)”이라는 말은 그 성씨의 뿌리를 찾는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좌전(左傳), 은공(隱公) 8년』에“성”과“씨”의 관계와 구별에 관한 글이 있다. “천자건덕(天子建德), 인생이사성(因生以賜姓), 조지토이명지씨(胙之土而命之氏), 제후이자위시(諸侯以字爲諡), 인이위족(因以爲族) ; 관유세공(官有世功), 즉유관족(則有官族), 읍역여지(邑亦如之)”라 하고 있다. “천자가 덕이 있는 사람을 제후(諸侯)로 삼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성을 하사하고,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주었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하였으며, 제후가 자(字)를 시호로 하면 이로서 족호로 하였다. 공이 있어 벼슬을 받으면 벼슬명을 족호로 하는 것이나 읍호로 그러하는 것이나 모두 같다.”즉, 천자가 제후를 분봉한 후 출생을 근거로 성을 주고 분봉토지로서 씨를 삼았다. 제후들이 자(字)를 지어 시호로 하면 후인들이 족호로 삼거나, 관직명, 봉지의 읍호를 족호로 짓는 것 등 이러한 족호들이 모두“씨”였다.

 

◇ 씨는 성의 지족(支族)

“씨”는“성”보다 늦게 나왔는데“성”의 지족(支族)이라 할 수 있다. “씨”가 나오게 된 것은 부계씨족사회에 있다. 주(周)대 분봉제도 때 성행하게 된다. 정초(鄭樵)의『통지(通志)·씨족략·서』에 이르기를“3대(하·상·주) 이전에는 성과 씨는 구분되어 남자는 씨를 칭하고 부인은 성을 칭하였다. 씨는 귀천을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귀한 사람은 씨가 있고 천한 사람은 이름은 있으되 씨는 없었다. 혼인을 할 때에도 구별이 있었다. 씨는 같으나 성이 다른 사람과는 혼인이 가능했으나 씨가 달라도 성이 같으면 혼인을 할 수 없었다.”

 

◇ “씨”는 동성부락의 명칭에서 부락의 수령을 가리키는 존호로 바뀜

최초로“씨”는 동성부락의 명칭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차 부락의 수령을 가리키는 존호로 바뀌게 된다. 전설 중에 부계사회의 영웅인물 칭호에 “씨”를 붙이는 것은 존칭으로서 이다.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씨, 태호(太昊) 복희씨, 소호(少昊) 금천(金天)씨 등이 그 예이다. 선진시기“씨”는 대개 부족을 나타내거나 종지(宗支)를 나타내는 휘호(徽号)였고 사회지위의 존비(尊卑)를 나타내는 귀천(貴賤)의 표지였다.

 

◇ “씨”는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고 부권제(父權制)의 확립으로 발전

“씨”로서 귀천을 구별하는 풍상(風尙-모습)은 부계씨족사회화 되면서 선진시기까지 상당히 성행하였는데“동성이씨(同姓異氏), 일성다씨(一姓多氏)”의 사회형국이 되기도 하였다. 마치 염제 신농씨가 본래 강(姜)성 부락의 시조였는데, 그 후예가 나뉘어 열산(列山)씨, 축융(祝融)씨 및 제(齊) 여(呂) 신(申) 허(許) 등의 씨족으로 분지(分支)되고, 황제 헌원씨는 희(姬)성 부락의 시조였는데 서로 다른 아들 25명이 있었고 12씨족으로 나뉘었다. 태호 복희씨, 소호 금천씨는 본시 동방 봉성(鳳姓) 부락의 수령으로 새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다. 그 후예들이 번연(繁衍)하였는데 봉조(鳳鳥)씨, 현조(玄鳥)씨, 단조(丹鳥)씨, 청조(靑鳥)씨, 구(鳩)씨, 상구(爽鳩)씨, 백조(伯趙)씨 및“오치(五雉)”“구호(九扈)”등 24개“이조명관(以鳥名官)”의 씨족이었다. 부권제(父權制)가 확립됨으로써「씨」가 형성되었는데 모계씨족이 점차 부계씨족으로 대체된 것이다. 소유적 혈연관계가 부계로 확실히 인식됨에 따라 모계씨족이 해체되고 부계씨족이 흥기하게 되어 성씨의 변화과정을 이루며 이 또한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것이다.

 

하(夏)대의 성씨정황은 문헌의 부족으로 고고학적 발현에 기대지만 시조 우(禹)가 희(姬)성이고, 그 후 분봉으로 씨부족이 나라로 되어, 하후(夏后)씨 유호(有扈)씨 유남(有男)씨 짐심(斟尋)씨 동성(彤城)씨, 포(褒)·비(費)·기(杞)·증(繒)·신(辛)·막(莫)씨 등 10여개 성씨가 되었다. 상(商)나라는 전형적 노예제 왕조인데 “조토명씨(胙土命氏)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받았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함) ”의 원칙이 정식으로 이루어져 성씨가 생산된다. 상은 적자(嫡子)가 왕위계승권을 갖는데 서자(庶子)는 “조토명씨(胙土命氏)”의 분봉권익을 가졌다. 공훈대신(功勳大臣), 부용(附庸)부락(큰 나라에 딸려 붙어서 지내는 작은 나라), 봉사(封賜)에 상응하는 후국(侯國), 채읍(采邑)(식읍食邑) 등으로 성씨가 대폭 증가되어“8백 제후”가 있었다하며『사기』,『세본』등 문헌에 나오는 성씨만도 수십여 개이다.(대부분 나라 이름을「씨」로 함)

 

◇“백성(百姓)”의 원래 뜻

『상서(尙書)』「반경(盤庚)」(상나라 19대 임금)조에 보면 은(殷)·상(商)의 귀족대성(大姓) 즉 지배층을 총칭하여“백성(百姓)”이라 불렀는데 이는 씨족사회 시기의 호칭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사회역사적 발전과 왕조의 바뀜이 빈번하여지자 귀족계층이 원봉읍과 지위를 잃게 되어 보통 서민(庶民)이 되었다. 그런데 원래 성씨는 그대로 갖고 있었으므로 후세에 역대의 서민을 총칭하는 뜻으로 바뀌게 된다. “백성”이 일반국민의 뜻으로 쓰이게 된 전고(典故)가 여기에 있다.

 

◇ 봉건적 종법제(宗法制)와 「씨」의 분화

주(周)나라는 봉방건국(封邦建國)과 엄격한 등급의 종법제(이를「봉건적종법제」라 함)를 서로 긴밀히 연결시켰다. 주천자(周天子)는 자칭 상천(上天)의 장자(長子)로서 천자로 칭하고 상천의 토지와 신민을 사급(賜給)하였다고 하였다.(적장자가 부친의 대를 이어 대종(大宗)이 되고 동생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주왕조 전체가 한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 즉 혈연의 위계질서 확립이 종법제이다) 주(周)나라 초에는 분봉된 제후가 71국(왕의 직할지(왕기王畿)를 제외하고는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 부름)이고 그중 동성인 희성(姬姓)의 제후가 40국, 이성(異姓)제후가 31국이었다. 주천자는 대종(大宗)으로 천하를 공주(共主)하고 각 제후 및 자국의 토지 안에서 분봉된 채지(采地)나 식읍(食邑)을 가진 동성 또는 이성의 경대부는 그 나라의 군(君)을 종주(宗主)로 하여 차례로 서민에까지 분봉하는 제도였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 한층 한 층씩 분봉되고 하나의 성(姓)이 여러 지계(支系)로 세분되어 새로운 씨족이 여러 갈래로 많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의 성(姓)이 여러 개의 씨로 나누이고 심지어 한사람이 여러 씨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천자는 주(周)를 씨로 하고, 수봉제후는 나라(國)를 씨로 하니 새로운 씨족이 형성되게 된다. 그 외에도 읍을 씨로, 작(爵)을 씨로, 족(族)을 씨로, 기(技)를 씨로, 시(諡)를 씨로 하는 등 여러 가지였다. 이렇게 출신가문과 사회지위에 따라“씨(氏)”가 표명됨으로 인하여“씨명귀천(氏明貴賤)”의 사회기능이 생겨나게 된다.

 

4) 성씨의 합일

“성별혼인(姓別婚姻)”,“씨명귀천(氏明貴賤)”과 같이 성과 씨를 구별하던 제도는 춘추시대(BC 8세기~5세기)까지도 변하지 않았는데 춘추말기 전국시대(BC 453 혹은 BC 403~)에 이르러 사회가 급격히 변동되는 여건 속에서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먼저 주천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들의 힘이 무력화됨에 따라“조토명씨(胙土命氏)”의 실력을 갖출 수 없게 된다. 제후들이 왕을 칭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할거하면서 영웅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러한 틈에 옛 대족(大族)의 집안은 나라가 멸하고 봉읍을 잃고 있을 곳도 없어지게 되어 서민으로 내려앉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혼란 속에“씨명귀천(氏明貴賤)”의 사회적 기능이 없어지고 현실적 의의가 끝나게 됨에 따라 성과 씨의 구별이라는 제도에도 변화 조짐이 일어나게 된다.

 

진(秦)이 6국을 멸한 후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가 시행되는데 그전의 많은 왕손, 귀족들은 서민과 죄인으로 된다. 진나라 말 한고조 유방, 회남왕 영포, 회음후 한신, 무양후 번쾌 등과 같이 진의 폭정에 대항하여 농민봉기가 크게 일어남에 따라 평민백성, 심지어 형노(刑奴), 백정까지도 왕이나 제(帝)로 칭하고 공(公)이나 후(侯)의 열에 오르게 된다.이러한 사회적 대변동의 결과 옛 귀족이 서민이 되고 어제의 평민이 새로운 귀족으로 상승하기도 하였다.

 

이에“조토명씨”의 종법(宗法)제도는 설 자리를 잃게 되고“씨명귀천”의 사회적 기능도 따라서 소실된다. 이에 종족(宗族)의 표지로서 만들어졌던“성”과“씨”는 이를 구별할 실질적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근근이 개인을 나타내거나 가족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부호로서 성씨로 하게 된다. 이로서 진한(秦漢)이후 성과 씨가 혼용되거나 성과 씨가 합하여 하나의 호칭으로 되게 된 것이다.정초(鄭樵)의『통지·씨족략·서』에도“3대(하·상·주)에는 성을 둘로 나누어 남자는 씨로 칭하고 부인은 성을 칭하였다. 씨로서 귀천을 구별하고 성으로서 혼인의 구별을 삼았다.

 

3대(하·상·주)후에 성과 씨의 둘이 하나로 합쳐져서 모두 혼인의 구별로 삼고 지망(地望)이 명천(明賤)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성씨의 혼용이나 합일은 한대(漢代)에 시작되는데 정식 문헌으로는 사마천의『사기』가 맨 처음으로 추정되는데 진시황을“성조씨(姓趙氏)”, 한고조 유방을“성유씨(姓劉氏)”라고 칭하고 있다. 진한(秦漢)이후 성씨를 구별하지 않거나 성만 부르거나 씨만 부르거나 혹은 성과 씨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성씨가 합일된 결과 원래 귀천을 나타내던“씨”가 원시적“성”으로 융입되게 된다.

 

 

* 『설문해자』- 후한 때 허신(許愼)이 만든 최초의 옥편

* 염제 열산씨 - 염제 신농(神農)씨가 원래 열산(호북성)에서 일어났다. 그래서『춘추좌씨전』에“열산씨”라는 씨명이 나온다. 열산의 별명이 여산(廬山)으로 여산씨라고도 한다.

* 안등(安登) -『사기』및『제왕세기』에는 여등(女登)으로 되어있다.

* 조토명씨- 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받았을 때 이 땅으로서 씨를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