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임씨와 임양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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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원

1. 서

 

한국임씨의 대종을 이루는 평택·예천·부안관과 그 계열관향은 중국에서 동도(東渡)하였다는 임팔급(林八及)공을 시조로 하면서 상계 선조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임팔급 · 양저(良貯) · 무(碔) · 희(禧) · 면(冕) · 득우(得雨) · 몽주(夢周)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선산임씨의 시조 임양저공이 팔급공의 다음 차 선조로 계대(系代)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임씨상계종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논점이 될 만한 사안인데 많은 임씨 종인들께서 한국 임씨의 소원(遡源)이 중국 임씨에 있다고 믿는 터라 양저공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 임씨와 임양저공과의 관계와 관련한 사안을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한국임씨 초기족보와 임양저공

 

한국임씨 각관의 초기족보 발간현황과 임양저공이 포함된 상계가 나오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1) 나주임씨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면서 최초보를 1659년(기해)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변동이 없음.

2) 조양임씨가 조양군 임세미(林世味)를 시조로 하는 최초보를 1742년(임술) 발간하였으며, 그후 1803년(계해) 2차수보 때 시조를 임팔급으로 하는 평택임씨 상계를 취하면서 세미공을 충정공 언수의 3자로 계대함.

3) 예천임씨가 1760년(경진) 임계미(林季味)를 시조로 하는 족보를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족보는 실물이 현존하지 않음.

4) 평택임씨 충정공(언수)계가 중국 한림학사·병부시랑 임팔급을 시조로 하는 최초보를 1764년(갑신) 발간하였는데 이때의 상계가「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로서 처음으로 양저공이 팔급공 다음 차에 등재됨.

5) 선산임씨는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이며 벼슬이 중랑장인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면서 최초보를 1766년(병술) 발간함.

6) 순창임씨가 상계를 임팔급(林八汲)으로 하는 족보를 1789년(기유) 발간하며, 그 후 1841년(신축) 수보 때 상계를「팔급·색·만옥·양저·무·희·면·득우·몽주·계미」로 함

7) 부안임씨가 금자광록대부 평원부안군 임계미(林季美)를 상계조로 하는 족보를 1799년(기미) 발간하고, 그 후 1854년(갑인) 보에서 임팔급·양저 등을 상계로 등재함 8) 한편 진천임씨는 고려대장군 흥화부원군 임희(林曦)를 시조로 하여 1783년(계묘)에 족보를 발간 함.

 

3. 선산임씨가 임양저공을 시조로 한 근거와 그 뒷받침

 

임양저공이 상계선조에 등재된 족보를 발간연대순으로 보면 최초가 1764년 평택관의『갑신보』인데, 여기에는 양저공이 시조 팔급공 다음 차로 계대(系代)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신임씨는 1766년 최초로『병술보』를 발간하면서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연대순에 따라 마치 선산관이 나중에 임양저공을 시조로 올린것같아보입니다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적으로는 선산관이 먼저 양저공을 시조로 올린 것입니다.

 

1) 선신임씨가 최초보를 1766년(영조42) 병술년에 발간하면서 시조를 임양저공으로 한 근거는, 1590년(선조23)경 쓰인「희재 임백령공행장」이 시조를 임양저공이라 하고 그 설화기사까지 싣고 있어서입니다.

① 이 기사는, 임백령공이 선산임씨이고 그 시조가 임양저공임을 밝히고, 양저공을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로서 중랑장이었는데 고려귀부를 극력 반대한 충신이었음과 이를 들은 고려태조가 그 자손을 각처로 내려 보내 그분들이 임씨 각관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화를 담고 있습니다.

② 이 행장은 희재공의 고향(해남) 후배 윤의중이 공의 사후 45년 정도 시점인 1590년(선조23)경 쓴 글입니다. 윤의중은 공의 서거시(1546 명종 원년) 23세의 청년으로서, 25세 때인 명종3년(1548)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강원도관찰사·성균관대사성·승정원 도승지·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낸 후, 선조 때 대사간·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한 저명한 문반입니다. 또한 윤씨와 임씨 양 가문은 척이 되기도 하는(윤의중의 부 윤구의 외조부와 희재공의 외조모가 초계정씨 남매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글쓴이의 학문적소양이 깊을 것임은 물론 행장의 주인공이 당대의 권신으로서 고향대선배가 되는 사이인데 어찌 선산임씨의 시조와 그 설화를 허투루 썼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③ 그런데 애석하게도 임양저라는 인물이 나오는 역사기록을 찾지 못하였고, 정현왕자도 경순왕 김부의 족보(경주김씨)등 제반 기록에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④ 그렇다하여 임양저 시조를 부인할 수 있을까요? 인물을 제외하고 시조설화는 신라 말·후삼국통일 전쟁 시기·고려 건국기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이 설화기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⑤ 득성·득관의 관점에서 보아도, 林이라는 성자(姓字)가 중국성씨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성씨보급의 역사에 비추어보아 신라 말 유력자가 林이라는 성씨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 예가 신라 말 경주인으로서 강주(진주)태수이자 고려태조 왕건의 비 천안부원부인 임씨의 아버지 임언(林彦)의 경우가 있으며, 임언은『삼국사기』기록상 유일한 林성의 예입니다. 이는 신라 말 경주에 임씨 성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는 유력한 증거로서 비록 임양저라는 이름이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씨 가문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좌가 되는 것입니다.

⑥ 다른 관점에서 보아 중요한 포인트가 시조가문의 신분입니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에 비추어보면 양저공 가문은 왕족의 후예일 개연성이 매우 높고 최소한 6두품 계급의 신분입니다.이러한 가문은 충분히 이른 시기에 성씨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⑦ 선산부사를 지낸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의『이존록』에 의하면, 선산임씨는 선산호장 선산김씨와 척의 관계로서 같은 호장가문입니다. 이점은 설화에서의 양저공 신분이 단순한 설화가 아니고 진정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 됩니다.

⑧ 이러한 양저공의 신분을 엄격한 신분체제의 사회구조로 보았을 때 그 가문이 결코 중국 도래인의 후예가 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2) 또 다른 근거가 되는 기록이 1692년(숙종18) 당대의 실력자 박세채(1621~1695)가 쓴「석천(임억령)공 묘표」입니다. 이 묘표에 시조를 임양저로 하면서 짦은 설화기사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희재공행장」의 설화기사와 동일합니다.박세채는 조선중기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임구령공의 사위 박응복의 증손자이며,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도자였습니다.

 

3) 더불어, 선산임씨의 최초족보 편수과정을 보면,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66년 병술년 보다 60여 년 전에 이미 족보편수를 준비한바 있고『병술보』실제 편수기간도 3년여가 되는 터라 선산보가 평택보 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산관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평택관 상계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후손 계복이 쓴『병술보』의 발문을 보면, 최초로 족보를 펴내고자 준비를 시작한 때가 1703년(숙종 29) 계미년 이었다합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있어 중단되었다가 60년 후인 1763년 (영조39) 계미년에 다시 발의 3년의 편수 기간을 거쳐 1766년 병술에 최초보를 출간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원성인 이의경이 쓴 서문을 보면, 당시 보사청 임원 낙선공(월당공 8세손)이 들려준 이야기에, 고사(古事)에 시랑 임팔급, 금시위 득우 같은 분이 계셨다하나 문헌이 믿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후손 봉령이 쓴 다른 발문을 보면, 선산임씨의 득관연유를“고려 태조가 양저공의 아홉 아들을 나누어 각 고을에 보내니 선산에 온 이가 우리관의 관조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때‘양지공의 아홉아들’이야기는 평택임씨족보에 있는 양지공설화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4. 평택임씨족보의 임양저공과 그 진정성

 

한국 임씨 족보에서 임양저공이 상계선조로 등장하는 경우는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관향에서입니다. 즉 앞에서 본 상계계보대로 팔급공 다음 차 선조가 양저공입니다. 최초로 족보에 등장하는 경우가 1764년(갑신)『평택임씨족보』인데, 중국에서 한림학사·병부시랑이셨던 임팔급이라는 분이 우리나라로 와서 평택임씨의 시조가 되었고 이분이 곧 한국임씨의 시조가 되며, 그 다음 차 선조가 임양저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택보 상계기록은 이후 조양관 등 여러관향족보로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저공 방주는 선산보의 설화기사와 비슷한데 여러 부분이 변작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원형이 선산보의 것임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1) 임씨상계의 임양저공 출처는 선산임씨에 있으며, 공은 선산관의 시조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산관은 확실한 근거에 따라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였고, 그 출전(出典)은 평택보(1764)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590년 경 쓰인 글이며, 그 찬자 윤의중은 저명한 고위문반으로서 학문적 소양 또한 갖춘 분입니다.

 

2) 평택관 최초족보(1764)에 나오는 양저공 방주기록의 설화기사는 그 출처가 선산관에 있음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평택보가 그 근거를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선산보 설화기사가 변작된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평택보의 양저공 설화기사를 보면, 양저공이 고려귀부를 극구 반대하니 경순왕이 노하여 공을 선산으로 귀양 보내고, 선산에서 살다가 생을 마치니 그 산소가 선산 평성(야성으로도 칭)에 있고 이 이야기가 『일선지』에 나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대로 라면, 선산관의 관조는 양저공이 되는 셈입니다.따라서 이 설화는 선산관에 관련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그 소스가 선산관에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일선지』가 쓰인 시기는 인조 때인데 선산보의 양저공 기사는 이보다 이른 선조 때 쓰인 글이므로 선산보 기사가 원형임이 분명해집니다.

설화기사 마지막부분에 범임씨적 득관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양저공은 자식이 9자인데 고려태조가 공의 충간사실을 듣고 공의 자식을 각처로 내려 보내니 그분들이 각처 관조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이 이야기는 선산보 기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즉 평택보의 ‘양저공 9자’ 이야기가 선산보에는‘그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설화대로라면 평택관을 비롯한 다수관향은 그 시조가 임양저공이 되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3) 평택보 기사가 변작되어 있고 사실관계에 맞지 않은 부분

공의 벼슬을「신라태사 상장군 중랑장」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고려시대의 벼슬호칭입니다. 선산보에서는「중랑장」이라고만 하였는데 중랑장은 중국의 무반 호칭으로서 고려 때 공식으로 쓰인 호칭이긴 하나 신라시대에도 호칭한 예가 있습니다.

선산보는 신라왕조를「만승지업(萬乘之業)」이라하였는데, 평택보는 제후국을 뜻하는「천승지업(千乘之業)」으로 격하하고 있습니다.

선산은 효공왕 10년(907) 이미 견훤이 장악하여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935.11) 후까지도 여전히 평정되지 못하다가 936. 9월에야 신검이 항복하여 최종 통일을 이룬 곳입니다.따라서 선산은 경순왕 때의 귀양지가 될 수 없습니다.

 

4) 사정이 이러하다면, 중국 도래인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평택관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임양저공을 그 설화와 함께 선산관에서 이입하였을 개연성이 농후합니다.『영암군지』에 의하면 평택임씨 충정공(언수)의 직계 종손 임첨(직장공)이 세종 때 영암으로 입향하였다 하는데 그 후손이 인근에 널리 거주하였을 것이며, 임첨공의 산소가 나주 송월동에 있고 그곳 재실이 향선재로서 평택관 충정공계종중 총본산입니다. 이로보아 선산관과 평택관 간에는 종사교환 등 교류가 있었을 것임은 쉬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5) 만약 임팔급 시조설을 하나의 전설로 치부하고 이를 별론으로 한다면, 평택임씨 시조 또한 임양저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지공설화의 득관기사가 각관에 공통으로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득관설화인즉, 경순왕의 고려귀부를 강하게 반대하던 양저공의 충간사실을 나중에 고려 태조가 듣고 그 자손(평택보는 9자)을 각처로 내려 보냈는데 그분들이 각처 관조가 되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 임씨들이 유의해볼만한 역사성 있는 포인트입니다.

 

5. 결론

 

한국 임씨 중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관향의 상계조(팔급~몽주)들은 아직까지는 그 실체적 근거를 알 수가 없으며, 어떻게 이분들이 상계선조에 등재되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여느 다른 성씨의 예처럼 특유의 가공(架空)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계선조 중 유일하게 그 출전이 확실한 경우가 임양저공입니다. 이 출전이 쓰인 시기와 설화내용의 신빙성에 비추어 보면 한국임씨 상계에 임양저공이 등장하는 기원은 선산임씨 설화에 있음이 확실해 보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나라 성씨의 생성과 보급의 역사에 비추어, 학술적으로는 임씨 시조 중국도래설이 근거가 없으며 족보상으로도 근거의 제시가 없습니다. 비록 임양저공이 역사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선산보의 설화기사 내용이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어 그 신빙성이 수긍되는 터라, 선산보의 설화대로라면 임양저공은 중국도래인 임팔급공의 후예가 아닙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임양저공은 한국임씨 다수 관향의 시조가 된다할 것이며 선산보 설화기사가 그 뒷받침입니다. 실제로 타관향 족보의 기록들에서도 태사공(양저공)을 기준으로 하는 글들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하 한국임씨 종인들의 강한 신념은 한국임씨의 기원이 중국에 있다하고 있습니다.

별표: 한국임씨 관향별 계보(안)

 

임용원

1. 서

 

한국임씨의 대종을 이루는 평택·예천·부안관과 그 계열관향은 중국에서 동도(東渡)하였다는 임팔급(林八及)공을 시조로 하면서 상계 선조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임팔급 · 양저(良貯) · 무(碔) · 희(禧) · 면(冕) · 득우(得雨) · 몽주(夢周)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선산임씨의 시조 임양저공이 팔급공의 다음 차 선조로 계대(系代)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임씨상계종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논점이 될 만한 사안인데 많은 임씨 종인들께서 한국 임씨의 소원(遡源)이 중국 임씨에 있다고 믿는 터라 양저공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 임씨와 임양저공과의 관계와 관련한 사안을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한국임씨 초기족보와 임양저공

 

한국임씨 각관의 초기족보 발간현황과 임양저공이 포함된 상계가 나오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1) 나주임씨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면서 최초보를 1659년(기해)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변동이 없음.

2) 조양임씨가 조양군 임세미(林世味)를 시조로 하는 최초보를 1742년(임술) 발간하였으며, 그후 1803년(계해) 2차수보 때 시조를 임팔급으로 하는 평택임씨 상계를 취하면서 세미공을 충정공 언수의 3자로 계대함.

3) 예천임씨가 1760년(경진) 임계미(林季味)를 시조로 하는 족보를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족보는 실물이 현존하지 않음.

4) 평택임씨 충정공(언수)계가 중국 한림학사·병부시랑 임팔급을 시조로 하는 최초보를 1764년(갑신) 발간하였는데 이때의 상계가「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로서 처음으로 양저공이 팔급공 다음 차에 등재됨.

5) 선산임씨는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이며 벼슬이 중랑장인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면서 최초보를 1766년(병술) 발간함.

6) 순창임씨가 상계를 임팔급(林八汲)으로 하는 족보를 1789년(기유) 발간하며, 그 후 1841년(신축) 수보 때 상계를「팔급·색·만옥·양저·무·희·면·득우·몽주·계미」로 함

7) 부안임씨가 금자광록대부 평원부안군 임계미(林季美)를 상계조로 하는 족보를 1799년(기미) 발간하고, 그 후 1854년(갑인) 보에서 임팔급·양저 등을 상계로 등재함 8) 한편 진천임씨는 고려대장군 흥화부원군 임희(林曦)를 시조로 하여 1783년(계묘)에 족보를 발간 함.

 

3. 선산임씨가 임양저공을 시조로 한 근거와 그 뒷받침

 

임양저공이 상계선조에 등재된 족보를 발간연대순으로 보면 최초가 1764년 평택관의『갑신보』인데, 여기에는 양저공이 시조 팔급공 다음 차로 계대(系代)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신임씨는 1766년 최초로『병술보』를 발간하면서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연대순에 따라 마치 선산관이 나중에 임양저공을 시조로 올린것같아보입니다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적으로는 선산관이 먼저 양저공을 시조로 올린 것입니다.

 

1) 선신임씨가 최초보를 1766년(영조42) 병술년에 발간하면서 시조를 임양저공으로 한 근거는, 1590년(선조23)경 쓰인「희재 임백령공행장」이 시조를 임양저공이라 하고 그 설화기사까지 싣고 있어서입니다.

① 이 기사는, 임백령공이 선산임씨이고 그 시조가 임양저공임을 밝히고, 양저공을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로서 중랑장이었는데 고려귀부를 극력 반대한 충신이었음과 이를 들은 고려태조가 그 자손을 각처로 내려 보내 그분들이 임씨 각관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화를 담고 있습니다.

② 이 행장은 희재공의 고향(해남) 후배 윤의중이 공의 사후 45년 정도 시점인 1590년(선조23)경 쓴 글입니다. 윤의중은 공의 서거시(1546 명종 원년) 23세의 청년으로서, 25세 때인 명종3년(1548)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강원도관찰사·성균관대사성·승정원 도승지·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낸 후, 선조 때 대사간·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한 저명한 문반입니다. 또한 윤씨와 임씨 양 가문은 척이 되기도 하는(윤의중의 부 윤구의 외조부와 희재공의 외조모가 초계정씨 남매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글쓴이의 학문적소양이 깊을 것임은 물론 행장의 주인공이 당대의 권신으로서 고향대선배가 되는 사이인데 어찌 선산임씨의 시조와 그 설화를 허투루 썼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③ 그런데 애석하게도 임양저라는 인물이 나오는 역사기록을 찾지 못하였고, 정현왕자도 경순왕 김부의 족보(경주김씨)등 제반 기록에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④ 그렇다하여 임양저 시조를 부인할 수 있을까요? 인물을 제외하고 시조설화는 신라 말·후삼국통일 전쟁 시기·고려 건국기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이 설화기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⑤ 득성·득관의 관점에서 보아도, 林이라는 성자(姓字)가 중국성씨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성씨보급의 역사에 비추어보아 신라 말 유력자가 林이라는 성씨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 예가 신라 말 경주인으로서 강주(진주)태수이자 고려태조 왕건의 비 천안부원부인 임씨의 아버지 임언(林彦)의 경우가 있으며, 임언은『삼국사기』기록상 유일한 林성의 예입니다. 이는 신라 말 경주에 임씨 성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는 유력한 증거로서 비록 임양저라는 이름이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씨 가문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좌가 되는 것입니다.

⑥ 다른 관점에서 보아 중요한 포인트가 시조가문의 신분입니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에 비추어보면 양저공 가문은 왕족의 후예일 개연성이 매우 높고 최소한 6두품 계급의 신분입니다.이러한 가문은 충분히 이른 시기에 성씨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⑦ 선산부사를 지낸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의『이존록』에 의하면, 선산임씨는 선산호장 선산김씨와 척의 관계로서 같은 호장가문입니다. 이점은 설화에서의 양저공 신분이 단순한 설화가 아니고 진정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 됩니다.

⑧ 이러한 양저공의 신분을 엄격한 신분체제의 사회구조로 보았을 때 그 가문이 결코 중국 도래인의 후예가 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2) 또 다른 근거가 되는 기록이 1692년(숙종18) 당대의 실력자 박세채(1621~1695)가 쓴「석천(임억령)공 묘표」입니다. 이 묘표에 시조를 임양저로 하면서 짦은 설화기사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희재공행장」의 설화기사와 동일합니다.박세채는 조선중기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임구령공의 사위 박응복의 증손자이며,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도자였습니다.

 

3) 더불어, 선산임씨의 최초족보 편수과정을 보면,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66년 병술년 보다 60여 년 전에 이미 족보편수를 준비한바 있고『병술보』실제 편수기간도 3년여가 되는 터라 선산보가 평택보 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산관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평택관 상계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후손 계복이 쓴『병술보』의 발문을 보면, 최초로 족보를 펴내고자 준비를 시작한 때가 1703년(숙종 29) 계미년 이었다합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있어 중단되었다가 60년 후인 1763년 (영조39) 계미년에 다시 발의 3년의 편수 기간을 거쳐 1766년 병술에 최초보를 출간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원성인 이의경이 쓴 서문을 보면, 당시 보사청 임원 낙선공(월당공 8세손)이 들려준 이야기에, 고사(古事)에 시랑 임팔급, 금시위 득우 같은 분이 계셨다하나 문헌이 믿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후손 봉령이 쓴 다른 발문을 보면, 선산임씨의 득관연유를“고려 태조가 양저공의 아홉 아들을 나누어 각 고을에 보내니 선산에 온 이가 우리관의 관조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때‘양지공의 아홉아들’이야기는 평택임씨족보에 있는 양지공설화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4. 평택임씨족보의 임양저공과 그 진정성

 

한국 임씨 족보에서 임양저공이 상계선조로 등장하는 경우는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관향에서입니다. 즉 앞에서 본 상계계보대로 팔급공 다음 차 선조가 양저공입니다. 최초로 족보에 등장하는 경우가 1764년(갑신)『평택임씨족보』인데, 중국에서 한림학사·병부시랑이셨던 임팔급이라는 분이 우리나라로 와서 평택임씨의 시조가 되었고 이분이 곧 한국임씨의 시조가 되며, 그 다음 차 선조가 임양저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택보 상계기록은 이후 조양관 등 여러관향족보로 전파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저공 방주는 선산보의 설화기사와 비슷한데 여러 부분이 변작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원형이 선산보의 것임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1) 임씨상계의 임양저공 출처는 선산임씨에 있으며, 공은 선산관의 시조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산관은 확실한 근거에 따라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였고, 그 출전(出典)은 평택보(1764)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590년 경 쓰인 글이며, 그 찬자 윤의중은 저명한 고위문반으로서 학문적 소양 또한 갖춘 분입니다.

 

2) 평택관 최초족보(1764)에 나오는 양저공 방주기록의 설화기사는 그 출처가 선산관에 있음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평택보가 그 근거를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면 선산보 설화기사가 변작된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평택보의 양저공 설화기사를 보면, 양저공이 고려귀부를 극구 반대하니 경순왕이 노하여 공을 선산으로 귀양 보내고, 선산에서 살다가 생을 마치니 그 산소가 선산 평성(야성으로도 칭)에 있고 이 이야기가 『일선지』에 나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대로 라면, 선산관의 관조는 양저공이 되는 셈입니다.따라서 이 설화는 선산관에 관련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그 소스가 선산관에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일선지』가 쓰인 시기는 인조 때인데 선산보의 양저공 기사는 이보다 이른 선조 때 쓰인 글이므로 선산보 기사가 원형임이 분명해집니다.

설화기사 마지막부분에 범임씨적 득관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양저공은 자식이 9자인데 고려태조가 공의 충간사실을 듣고 공의 자식을 각처로 내려 보내니 그분들이 각처 관조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이 이야기는 선산보 기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즉 평택보의 ‘양저공 9자’ 이야기가 선산보에는‘그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설화대로라면 평택관을 비롯한 다수관향은 그 시조가 임양저공이 되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3) 평택보 기사가 변작되어 있고 사실관계에 맞지 않은 부분

공의 벼슬을「신라태사 상장군 중랑장」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고려시대의 벼슬호칭입니다. 선산보에서는「중랑장」이라고만 하였는데 중랑장은 중국의 무반 호칭으로서 고려 때 공식으로 쓰인 호칭이긴 하나 신라시대에도 호칭한 예가 있습니다.

선산보는 신라왕조를「만승지업(萬乘之業)」이라하였는데, 평택보는 제후국을 뜻하는「천승지업(千乘之業)」으로 격하하고 있습니다.

선산은 효공왕 10년(907) 이미 견훤이 장악하여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935.11) 후까지도 여전히 평정되지 못하다가 936. 9월에야 신검이 항복하여 최종 통일을 이룬 곳입니다.따라서 선산은 경순왕 때의 귀양지가 될 수 없습니다.

 

4) 사정이 이러하다면, 중국 도래인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평택관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임양저공을 그 설화와 함께 선산관에서 이입하였을 개연성이 농후합니다.『영암군지』에 의하면 평택임씨 충정공(언수)의 직계 종손 임첨(직장공)이 세종 때 영암으로 입향하였다 하는데 그 후손이 인근에 널리 거주하였을 것이며, 임첨공의 산소가 나주 송월동에 있고 그곳 재실이 향선재로서 평택관 충정공계종중 총본산입니다. 이로보아 선산관과 평택관 간에는 종사교환 등 교류가 있었을 것임은 쉬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5) 만약 임팔급 시조설을 하나의 전설로 치부하고 이를 별론으로 한다면, 평택임씨 시조 또한 임양저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지공설화의 득관기사가 각관에 공통으로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득관설화인즉, 경순왕의 고려귀부를 강하게 반대하던 양저공의 충간사실을 나중에 고려 태조가 듣고 그 자손(평택보는 9자)을 각처로 내려 보냈는데 그분들이 각처 관조가 되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 임씨들이 유의해볼만한 역사성 있는 포인트입니다.

 

5. 결론

 

한국 임씨 중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는 관향의 상계조(팔급~몽주)들은 아직까지는 그 실체적 근거를 알 수가 없으며, 어떻게 이분들이 상계선조에 등재되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여느 다른 성씨의 예처럼 특유의 가공(架空)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계선조 중 유일하게 그 출전이 확실한 경우가 임양저공입니다. 이 출전이 쓰인 시기와 설화내용의 신빙성에 비추어 보면 한국임씨 상계에 임양저공이 등장하는 기원은 선산임씨 설화에 있음이 확실해 보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나라 성씨의 생성과 보급의 역사에 비추어, 학술적으로는 임씨 시조 중국도래설이 근거가 없으며 족보상으로도 근거의 제시가 없습니다. 비록 임양저공이 역사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선산보의 설화기사 내용이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어 그 신빙성이 수긍되는 터라, 선산보의 설화대로라면 임양저공은 중국도래인 임팔급공의 후예가 아닙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임양저공은 한국임씨 다수 관향의 시조가 된다할 것이며 선산보 설화기사가 그 뒷받침입니다. 실제로 타관향 족보의 기록들에서도 태사공(양저공)을 기준으로 하는 글들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하 한국임씨 종인들의 강한 신념은 한국임씨의 기원이 중국에 있다하고 있습니다.

별표: 한국임씨 관향별 계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