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希齋) 임백령공(林白齡)공

HOME > 희재(希齋) 임백령공(林白齡)공

 

(5) 「위훈상소」의 임백령 관련조항 검토

앞에서 자세히 밝힌 바와 같이『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조에 나오는「위훈개삭(僞勳改削)」의 홍문관(弘文館) 상차(上箚)에「12개의 무망(無望)의 증거」와「14개의 허위의 단서」가 열거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임백령이 단독으로 거명되어 있는 조항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공동거명은 생략)

① 「첫 번째 무망의 증거」로서, 위훈상소에서 임백령 조(祖)에 직접 관련된 조항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흉당(凶黨)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던 중 임백령이 고변(告變)하자는 음모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라 하고 있습니다.

•  사전에서「고변(告變)」을 찾아보면「변이(變異)를 알림」또는「반역을 고발함」으로 되어 있는 바, 여기서「변이」란「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반역)」일 것이며,「고발을 받는 주체」는 왕(문정왕후)일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문정왕후일 것인데, 그 왕후에게 다시 무엇을 알린다(고변)는 말입니까.

 왕후가“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려 대신들에게 알렸다.”고 하였는데, 거꾸로 임백령(당시 판서)이 왕후에게 무엇을 알린다는 말입니까.

 임백령이「음모」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하였는데,일개 개인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을 거짓으로 꾸몄단 말입니까.일개 외간 인이 구중내간사(九重內間事)의 연출자이며 왕후 등은 그 연기자라는 말입니까.

② 「여덟 번째 무망의 증거」로서,“…이덕응(李德應)이 심문당할 때 임백령은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고 송세형(宋世珩)은 안에서 거짓 눈물까지 보이면서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감언이설로 자신의 죽음을 면키 위하여 남을 함정에 빠트리도록 꾀였습니다….”하였는데,

 이덕응은 윤임의 사위인 바, 그의 무복(誣服)(거짓증언)으로 윤임의 반역죄가 입증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임백령이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여 이덕응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감옥에 수용 격리되어 있는 것이고 죄인과의 접촉은 취조하는 추관(推官)뿐일 터인데, 추관도 아닌 임백령이 어떻게, 더군다나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여 꾀였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위훈의 상소인즉 의당히 6하 원칙에 의거한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어야할 진대, 단순한 서술인 점으로 보아 시정(市井)에 유포된 전언(傳言)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허위의 단서」로서, “정순붕의 상소가 올라와서 3인의 정죄(定罪)를 논할 때 임백령이‘저들 3인은 스스로 벼슬자리를 잃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원훈(元勳)에 참록되었고 사기(事機)에 밝다는 백령이라면 3인의 불궤(不軌)의 내용을 모두 속속들이 다알고 있을 것인데, 왜 분명한 말을 하지 않고「벼슬자리 염려하는 문제」만 말했습니까…”하여 임백령이 미리 다 알고 있었을 터인데 말을 안했으니 음모를 감추고 있었다고 하는「허위의 단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정순붕의 상소로 비로소 그 반역의 전모가, 임백령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모두 알려진 사항이 되었으므로 구태여 재론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하필 임백령만 거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한,「알고 있었을 터인데 말을 안했으니… 감추고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하였는데「알고」「모르고」하는 사람의 심중(心中)을 투시해 보았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심중을 헤아려(즉 심증만으로)「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지적은 앞에서 말한 전형적인 네거티브 수법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이 이이(李珥)의「위훈소(僞勳疏)」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12개의 증거」와「14개의 단서」중에서「임백령의 단독행위」로 제시 되어 있는 부분의 전부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들이 을사사화의 수모(首謀)라고 지탄하는「증거」로서는, 그 수(數)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논거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임백령을 수모라고 말하는데 필자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정(市井)의 유언(流言)을 가지고「증거」라고 하는 것도 현 법이론상 으로도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재언을 요하지 않습니다.

 

4) 여기서 다시한번 임백령 조(祖)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위에서 필자는「을사사건」의 원인, 과정, 결과 및 배경과「위훈개삭」의 전반에 걸쳐서『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검토해 보았습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을사사화」는,

 윤임 등이 인종의 장래에 위해요소가 된다고 하여, 문정왕후를 제거하고 그 일족을 축출하려 도모한데 대하여, 왕후 측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대항전이 바로 이 사건의 배경인 것이며

 인종이 급서하고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됨에 온갖 위험에 처해있던 왕후가 「제신의 의득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이라 하여, 윤임 등에게 직접 사죄(死罪)의 결정을 내린 피의 보복사건, 즉 대윤에 대한 소윤(왕후)의 당연한 응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의 수모(首謀)(주체 또는 본체)는 바로 문정왕후 자신이며, 그 외의 자는 대리자(협조 내지 줄서기 한자)에 불과하며 임백령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림들은 이와 같은 근원적이고도 구조적인 대립관계의 배경을 무시한채(또는 모른척하면서) 당시의 대리자들에게만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돌리고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임백령은 그의 관료생활 전 기간은 물론, 사건 전후의 짧은 기간(약10개월 내외)동안 왕조실록의 기(記)·계(啓)·차(箚)·소(疏) 기타 어떠한 기록에도, 윤임 등 대윤 측에 대한 엄벌이나 사죄(死罪)등 과도한 처벌을 주장한 논계(論啓)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감죄(減罪) 또는 영구(營救)하고 있는 것이 기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백령을 을사사건의 수모자(首謀者)·고변자(告變者)·2간(奸) 또는 4악(惡)으로 몰아 부치고 심히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가) 임백령에 대한 이와 같은 폄하는, 상술한 바와 같이 왕조실록의「사왈(史曰)」부분과 이이(李珥)의「을사위훈차(箚)」및 후대 이긍익(李肯翊)의『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등에 의한 것인데, 이는 모두 신진사림 측에 의한 기술인 것이며(『연려실기술』의 기록도『석담일기』,『율곡집』등 율곡의 문집에서 인용된 것이 주류를 이룸 )

나) 임백령이 을사사건에 관계되는 기간은 인종의 발병(인종 1년 1545년 을사 6월경)부터 그의 중국사신 출발(명종 1년 1546년 3월경-명종실록에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계啓)까지의 약 10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1) 후대의 사림들은 을사의 위사공신을 하나의 SCAPEGOAT(희생양)로 삼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취하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누차 밝힌 바와 같이, 을사사건은 양파의 단순한 싸움이 아니고 왕위 계승을 위요한 윤임 일파와 문정왕후간의 생사를 건 일대파쟁이었고, 따라서 그 주체(본체)가 문정왕후인 것을 능히 알고 있으면서도 왕후에 대한 직언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일언반구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대리자(공신 등)들만 맹렬히 비난 탄핵함으로써 왕후에 대한 울분을 그들에게 전가하여 대리 만족을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왕후에 대해서는“간신(奸臣)들이 사설(邪說)을 조작하여 왕후를 기망하고……”하는 식으로(왕후는 그 내용을 사전에 전연 몰랐던 것으로) 왕후를 오히려 적극 변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

피화자는 대윤측이므로 대윤측에서 항변이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림 측에서 항변하고 있는 것도 이 사건의 특이점입니다.

(2) 당시의 사림파들이 자기들의 실세(實勢)만회와 유리한 체제정비를 위하여「위훈개삭의 문제」를 정치적 이슈(논점)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기묘사화 이래 누차의 사화와 문정왕후(윤원형)의 집권시 유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던 사림들이 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몰락함으로써 귀양이 풀리어 정계에 다시 복귀하고, 다른 한편 재야의 신진사류들이 새로 등용됨으로써 사림의 재정비와 결속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기에는 동일성과 동지성(同志性)을 확보하고 그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강력한 공동의 정치적 이슈와 구호가 필요한 것은 고금이 동일하며 이에 「위훈문제」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이의「위훈소(僞勳疏)」의 목적이「사회기강의 확립, 위훈을 삭탈하여 정의를 밝히고 붕당의 폐를 씻고 화합을 구함」이었을 진대, 그 후 사림들의 행적 즉 왕위의 계승과 건저(建儲)문제 등을 둘러싸고 계속 피로 피를 씻는 그들의 붕쟁사(朋爭史)를 일별할 때 이때의 이러한 정치구호가 무색할 뿐 아니라 단지 당시 사림들의 실세 만회용의 구호에 불과하였다고 말해도 변명의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3) 또한 임백령에 대한 폄하와 평가 절하는 그의 총명한 두뇌와 민첩한 행동 및 사건 후「벼락출세」에 대한 사림과 세인들의 질시(嫉視)도 한 몫 하였다고 보여 집니다.

1등 공신 4인 중에 두뇌가 제일 좋았으니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이고 사기(事機)에도 밝았으니 기민하게 처신했을 것이며(『왕조실록』의「사왈」부분에 온갖 전언, 추측기사로 뒤덮여있음.)

사건 후 불과 3개월 만에 1등공신, 숭선부원군, 보국숭록대부(정1품)으로 승진한 것 또한 질시의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1품으로서의 승차는 중국 사신을 가기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니 우리는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취임에 즈음하여 갑자기 육군대장으로 승차하였을 때의 세평을 경험한바 있습니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기서거(逝去)를 그 가장 큰 이유로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으니 변명의 겨를이 없고 기록도 없으며 모든 허물은 사자에게 몰아서 전가되기 마련인 것이며

선생의 서거 후 득세한 윤원형 일파가 일으킨 사건(정미, 기유 등)과 횡포(을사이래 5~6년간 비명에 죽은 인사가 백여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사화」조)에 대한 허물까지도 임백령 조(祖)가 도매금으로 함께 짊어지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임백령이 좀더 장수하였던들 영의정 같은 실직(實職)에 수임되었을 것이고 영향력을 발휘하여 윤원형 등의 행패를 견제하였을 것이며 을사의 충격도 좋은 방향으로 수쇄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선생의 조기서거는 본인은 물론 우리 가문으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대단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을사사건의 내용과 특징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위훈개삭(僞勳改削)」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문정왕후 생존 시는 물론 명종대에서는「위훈 운운」의 이야기가 일체 나오지 않았다는 점

명종시대가 가고 선조(宣祖) 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이 문제가 솔솔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드디어 선조 3년(1570) 4월 이이가 앞장서서「을사위훈개삭소(乙巳僞勳改削疏)」를 올렸으나 훈구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며 (『율곡전서』권 33 경오 4년 조 기사 참조 )

 나중에 영의정 이준경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된다.> 말하였던 점(『선조실록』10년 12월 4일 병술일 기사참조)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도 매우 어렵게 여기고 찬동치 않았던 점(『선조실록』10년 12월 4일 병술일 기사참조)

- 이황은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자로서 이(理)는 도심(道心), 본연지성(本然之性)이요 기(氣)는 인심기질지성(人心氣質之性)이며 이 양자는 선후, 상하의 구별이 있고합칠 수 없는 복종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기는 왕(王)·신(臣) 관계에 있는 것이요 인심(臣)은 항상 도심(王)의 명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념에따라 왕(문정왕후)의 결정에 반대하는 신(사림)의 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이 등 3사(三司) 사림들의 연일 상소에 대하여 선조는“선왕께서 동맹(同盟)한 큰일이니, 나로서는 손댈 수 없다”하고 계속 불윤(不允)하였다는 점(『선조실록』3년 6월 28일 )

 양사(兩司), 유생(儒生)들이 계속 상차(上箚) 계진(啓進)하니 선조 3년 4월 1일 우선 정미, 기유의 희생자를 신면하고 그 허물을 물어 이기, 정언각 의 삭탈만 명령한 점(『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

 그 후 이이의 41회에 걸친 상차에도 불윤으로 일관하였다가 선조 10년 12월 8일, 인종비(仁宗妃) 임종시의 마지막 간청에 못 이겨 드디어「을사훈작의 삭제」가 윤허된 점 등입니다.

 이상과 같이「을사위훈」의 삭제문제가,

가) 당초 왕과 훈구 측의 찬동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림 측의 주장대로 을사사건을 전적으로 악으로만 평가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나) 훈작 후 장장 32년(명종 즉위년~선조 10년), 선조로 임금이 바뀌고서도 10년 만에야 삭훈이 결정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개삭(改削)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 오늘날 을사사건과 그 원훈(元勳)들이 악의 축(軸)으로 지목되어 있는 것은 오직 사림들의 끈질긴 인해전술의 결과라고 봅니다.

(5) 참고로 일각에서는 고종 1년(1864 갑자) 7.11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때에 공에 대해서도 공훈이 복구되었다는 설이 있으나『고종실록』,『승정원일기』「고종」편 등을 세밀히 확인하였으나 명백히 나타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pp007.jpg

임백령(林百齡)의 글씨 :『명가필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청송 성수침(成守琛)에 대한 답서: 충고에 대한 감사의 말과

밀감 4개를 보내니, 손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임

 

 

◇ 『한국사』의 기술내용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한국사』(2003.11.30)는「삭훈」의 문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한국사』는 필자의 실명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은 현대판「사관」이라 할 수 있는 사계의 권위자들로서 해당분야 전공학자들입니다.)

먼저「삭훈」논의가 제기된 배경으로, 신진사류가 선조의 즉위로 세력화하여 언론권을 장악하고 연이어 구신들과의 권력다툼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며 구신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데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진 사류는 드디어 선조 3년(1570) 4월 백인걸(白仁傑)의 신원상소를 효시로 삼사의 상소가 뒤따랐고 이이가 홍문관 교리가 된 5월 이후 삭훈 논의가 본격화되어, 그 결과 대다수의 피화인은 신원되었으나 유관, 유인숙 및 윤임과 계림군의 복관 그리고 삭훈 문제는 끝내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전에 이 위훈개삭 주장은 을사사화 자체를 무효화하는 의미를 지니므로 거기서부터 비롯된 권신체제 하에서 벼슬한 구신들의 처지나 명분이 무너짐은 말할 것도 없고, 사화를 역옥(逆獄)으로 인정하고 공신칭호까지 내려준 명종의 처분을 부정함으로써 명종의 후계자였던 선조의 명분까지 난처함에 빠트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을사신원과 삭훈 문제에 관하여는 사류들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고 사류내의 의견도 한결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이·정철·이해수 등 신진사류들은 사화자체를 역모사건이 아니라, 윤원형·이기 등이 공을 탐해 날조한 무옥(誣獄)으로 보아 완전한 신원과 삭훈론을 편 것입니다. ※ 을사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무옥이 아님은 앞에서 자세히 언급한 것을 보시지 않 았습니까!

그럼에도 신진사류의 종장(宗長)이라 할 이황이나 선배 격에 해당되는 허엽(許曄)은 윤임과 계림군 류(瑠)는 신원되기 어렵고 따라서 삭훈은 쉽지 않을 것이란 인식을 가졌으며 신진사류의 선도자 기대승도 삭훈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견이 있고 난관과 반대가 예상되었지만 사류들로서는 이것이 사림적 명분을 바로잡는 일일 뿐 아니라 신진사류 자신의 정치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안정을 보장받는다는 현실적인 면에서 이를 밀어 붙였으나 삭훈 문제는 끝내 성취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삭훈 논의를 거치면서 구신계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는데 이준경이 선조 4년 5월 영의정에서 사직하고 우의정 오겸과 우찬성 박충원은 탄핵으로 면직되고 신진사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던 이탁(李鐸)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정국의 주도권은 점차 신진사류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선조 5년과 6년 사이에는 인사파문이 거듭되다가 6년 9월 마침내 영의정에 이탁, 좌의정 박순, 우의정 노수신으로 의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청요직에 머물던 사류로서는 자기계열의 인물들로 자리를 채우게 됨으로서 비로소 국정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고 바야흐로 사림의 정치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권을 확보한 사류들은 드디어 선조 10년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위독할 때 대비의 지원(至願)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선조가 결단을 내림으로서 삭훈 문제는 사림들의 의도대로 실현되게 된것입니다. (이상『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42~44쪽 참조-필자 : 정만조<鄭萬祚>)

 

 

 

(5) 「위훈상소」의 임백령 관련조항 검토

앞에서 자세히 밝힌 바와 같이『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조에 나오는「위훈개삭(僞勳改削)」의 홍문관(弘文館) 상차(上箚)에「12개의 무망(無望)의 증거」와「14개의 허위의 단서」가 열거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임백령이 단독으로 거명되어 있는 조항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공동거명은 생략)

① 「첫 번째 무망의 증거」로서, 위훈상소에서 임백령 조(祖)에 직접 관련된 조항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흉당(凶黨)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던 중 임백령이 고변(告變)하자는 음모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라 하고 있습니다.

•  사전에서「고변(告變)」을 찾아보면「변이(變異)를 알림」또는「반역을 고발함」으로 되어 있는 바, 여기서「변이」란「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반역)」일 것이며,「고발을 받는 주체」는 왕(문정왕후)일 것이 자명합니다.

•  그런데 앞에서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문정왕후일 것인데, 그 왕후에게 다시 무엇을 알린다(고변)는 말입니까.

•  왕후가“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려 대신들에게 알렸다.”고 하였는데, 거꾸로 임백령(당시 판서)이 왕후에게 무엇을 알린다는 말입니까.

•  임백령이「음모」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하였는데,일개 개인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을 거짓으로 꾸몄단 말입니까.일개 외간 인이 구중내간사(九重內間事)의 연출자이며 왕후 등은 그 연기자라는 말입니까.

② 「여덟 번째 무망의 증거」로서,“…이덕응(李德應)이 심문당할 때 임백령은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고 송세형(宋世珩)은 안에서 거짓 눈물까지 보이면서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감언이설로 자신의 죽음을 면키 위하여 남을 함정에 빠트리도록 꾀였습니다….”하였는데,

•  이덕응은 윤임의 사위인 바, 그의 무복(誣服)(거짓증언)으로 윤임의 반역죄가 입증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임백령이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여 이덕응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감옥에 수용 격리되어 있는 것이고 죄인과의 접촉은 취조하는 추관(推官)뿐일 터인데, 추관도 아닌 임백령이 어떻게, 더군다나 밖에서, 달콤한 말을 하여 꾀였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  위훈의 상소인즉 의당히 6하 원칙에 의거한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어야할 진대, 단순한 서술인 점으로 보아 시정(市井)에 유포된 전언(傳言)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③ 「여덟 번째 허위의 단서」로서, “정순붕의 상소가 올라와서 3인의 정죄(定罪)를 논할 때 임백령이‘저들 3인은 스스로 벼슬자리를 잃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원훈(元勳)에 참록되었고 사기(事機)에 밝다는 백령이라면 3인의 불궤(不軌)의 내용을 모두 속속들이 다알고 있을 것인데, 왜 분명한 말을 하지 않고「벼슬자리 염려하는 문제」만 말했습니까…”하여 임백령이 미리 다 알고 있었을 터인데 말을 안했으니 음모를 감추고 있었다고 하는「허위의 단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때는 정순붕의 상소로 비로소 그 반역의 전모가, 임백령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모두 알려진 사항이 되었으므로 구태여 재론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하필 임백령만 거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  또한,「알고 있었을 터인데 말을 안했으니… 감추고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하였는데「알고」「모르고」하는 사람의 심중(心中)을 투시해 보았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심중을 헤아려(즉 심증만으로)「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지적은 앞에서 말한 전형적인 네거티브 수법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이 이이(李珥)의「위훈소(僞勳疏)」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12개의 증거」와「14개의 단서」중에서「임백령의 단독행위」로 제시 되어 있는 부분의 전부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들이 을사사화의 수모(首謀)라고 지탄하는「증거」로서는, 그 수(數)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논거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임백령을 수모라고 말하는데 필자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정(市井)의 유언(流言)을 가지고「증거」라고 하는 것도 현 법이론상 으로도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재언을 요하지 않습니다.

 

4) 여기서 다시한번 임백령 조(祖)를 돌아보기로 합니다.

위에서 필자는「을사사건」의 원인, 과정, 결과 및 배경과「위훈개삭」의 전반에 걸쳐서『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검토해 보았습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을사사화」는,

•  윤임 등이 인종의 장래에 위해요소가 된다고 하여, 문정왕후를 제거하고 그 일족을 축출하려 도모한데 대하여, 왕후 측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대항전이 바로 이 사건의 배경인 것이며

•  인종이 급서하고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됨에 온갖 위험에 처해있던 왕후가 「제신의 의득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이라 하여, 윤임 등에게 직접 사죄(死罪)의 결정을 내린 피의 보복사건, 즉 대윤에 대한 소윤(왕후)의 당연한 응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의 수모(首謀)(주체 또는 본체)는 바로 문정왕후 자신이며, 그 외의 자는 대리자(협조 내지 줄서기 한자)에 불과하며 임백령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림들은 이와 같은 근원적이고도 구조적인 대립관계의 배경을 무시한채(또는 모른척하면서) 당시의 대리자들에게만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돌리고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임백령은 그의 관료생활 전 기간은 물론, 사건 전후의 짧은 기간(약10개월 내외)동안 왕조실록의 기(記)·계(啓)·차(箚)·소(疏) 기타 어떠한 기록에도, 윤임 등 대윤 측에 대한 엄벌이나 사죄(死罪)등 과도한 처벌을 주장한 논계(論啓)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감죄(減罪) 또는 영구(營救)하고 있는 것이 기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백령을 을사사건의 수모자(首謀者)·고변자(告變者)·2간(奸) 또는 4악(惡)으로 몰아 부치고 심히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가) 임백령에 대한 이와 같은 폄하는, 상술한 바와 같이 왕조실록의「사왈(史曰)」부분과 이이(李珥)의「을사위훈차(箚)」및 후대 이긍익(李肯翊)의『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등에 의한 것인데, 이는 모두 신진사림 측에 의한 기술인 것이며(『연려실기술』의 기록도『석담일기』,『율곡집』등 율곡의 문집에서 인용된 것이 주류를 이룸 )

나) 임백령이 을사사건에 관계되는 기간은 인종의 발병(인종 1년 1545년 을사 6월경)부터 그의 중국사신 출발(명종 1년 1546년 3월경-명종실록에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계啓)까지의 약 10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1) 후대의 사림들은 을사의 위사공신을 하나의 SCAPEGOAT(희생양)로 삼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취하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누차 밝힌 바와 같이, 을사사건은 양파의 단순한 싸움이 아니고 왕위 계승을 위요한 윤임 일파와 문정왕후간의 생사를 건 일대파쟁이었고, 따라서 그 주체(본체)가 문정왕후인 것을 능히 알고 있으면서도 왕후에 대한 직언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일언반구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대리자(공신 등)들만 맹렬히 비난 탄핵함으로써 왕후에 대한 울분을 그들에게 전가하여 대리 만족을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① 왕후에 대해서는“간신(奸臣)들이 사설(邪說)을 조작하여 왕후를 기망하고……”하는 식으로(왕후는 그 내용을 사전에 전연 몰랐던 것으로) 왕후를 오히려 적극 변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

② 피화자는 대윤측이므로 대윤측에서 항변이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림 측에서 항변하고 있는 것도 이 사건의 특이점입니다.

(2) 당시의 사림파들이 자기들의 실세(實勢)만회와 유리한 체제정비를 위하여「위훈개삭의 문제」를 정치적 이슈(논점)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① 조광조에 대한 기묘사화 이래 누차의 사화와 문정왕후(윤원형)의 집권시 유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던 사림들이 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몰락함으로써 귀양이 풀리어 정계에 다시 복귀하고, 다른 한편 재야의 신진사류들이 새로 등용됨으로써 사림의 재정비와 결속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기에는 동일성과 동지성(同志性)을 확보하고 그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강력한 공동의 정치적 이슈와 구호가 필요한 것은 고금이 동일하며 이에 「위훈문제」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이이의「위훈소(僞勳疏)」의 목적이「사회기강의 확립, 위훈을 삭탈하여 정의를 밝히고 붕당의 폐를 씻고 화합을 구함」이었을 진대, 그 후 사림들의 행적 즉 왕위의 계승과 건저(建儲)문제 등을 둘러싸고 계속 피로 피를 씻는 그들의 붕쟁사(朋爭史)를 일별할 때 이때의 이러한 정치구호가 무색할 뿐 아니라 단지 당시 사림들의 실세 만회용의 구호에 불과하였다고 말해도 변명의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3) 또한 임백령에 대한 폄하와 평가 절하는 그의 총명한 두뇌와 민첩한 행동 및 사건 후「벼락출세」에 대한 사림과 세인들의 질시(嫉視)도 한 몫 하였다고 보여 집니다.

① 1등 공신 4인 중에 두뇌가 제일 좋았으니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이고 사기(事機)에도 밝았으니 기민하게 처신했을 것이며(『왕조실록』의「사왈」부분에 온갖 전언, 추측기사로 뒤덮여있음.)

② 사건 후 불과 3개월 만에 1등공신, 숭선부원군, 보국숭록대부(정1품)으로 승진한 것 또한 질시의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1품으로서의 승차는 중국 사신을 가기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니 우리는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취임에 즈음하여 갑자기 육군대장으로 승차하였을 때의 세평을 경험한바 있습니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기서거(逝去)를 그 가장 큰 이유로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① 사자(死者)는 말이 없으니 변명의 겨를이 없고 기록도 없으며 모든 허물은 사자에게 몰아서 전가되기 마련인 것이며

② 선생의 서거 후 득세한 윤원형 일파가 일으킨 사건(정미, 기유 등)과 횡포(을사이래 5~6년간 비명에 죽은 인사가 백여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사사화」조)에 대한 허물까지도 임백령 조(祖)가 도매금으로 함께 짊어지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만일 임백령이 좀더 장수하였던들 영의정 같은 실직(實職)에 수임되었을 것이고 영향력을 발휘하여 윤원형 등의 행패를 견제하였을 것이며 을사의 충격도 좋은 방향으로 수쇄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선생의 조기서거는 본인은 물론 우리 가문으로 보나 국가적으로 보나 대단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을사사건의 내용과 특징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위훈개삭(僞勳改削)」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 문정왕후 생존 시는 물론 명종대에서는「위훈 운운」의 이야기가 일체 나오지 않았다는 점

• 명종시대가 가고 선조(宣祖) 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이 문제가 솔솔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점.

•  드디어 선조 3년(1570) 4월 이이가 앞장서서「을사위훈개삭소(乙巳僞勳改削疏)」를 올렸으나 훈구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며 (『율곡전서』권 33 경오 4년 조 기사 참조 )

•  나중에 영의정 이준경도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된다.> 말하였던 점(『선조실록』10년 12월 4일 병술일 기사참조)

•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도 매우 어렵게 여기고 찬동치 않았던 점(『선조실록』10년 12월 4일 병술일 기사참조)

- 이황은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자로서 이(理)는 도심(道心), 본연지성(本然之性)이요 기(氣)는 인심기질지성(人心氣質之性)이며 이 양자는 선후, 상하의 구별이 있고합칠 수 없는 복종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기는 왕(王)·신(臣) 관계에 있는 것이요 인심(臣)은 항상 도심(王)의 명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념에 따라 왕(문정왕후)의 결정에 반대하는 신(사림)의 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이이 등 3사(三司) 사림들의 연일 상소에 대하여 선조는“선왕께서 동맹(同盟)한 큰일이니, 나로서는 손댈 수 없다”하고 계속 불윤(不允)하였다는 점(『선조실록』3년 6월 28일 )

•  양사(兩司), 유생(儒生)들이 계속 상차(上箚) 계진(啓進)하니 선조 3년 4월 1일 우선 정미, 기유의 희생자를 신면하고 그 허물을 물어 이기, 정언각 의 삭탈만 명령한 점(『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 )

•  그 후 이이의 41회에 걸친 상차에도 불윤으로 일관하였다가 선조 10년 12월 8일, 인종비(仁宗妃) 임종시의 마지막 간청에 못 이겨 드디어「을사훈작의 삭제」가 윤허된 점 등입니다.

•  이상과 같이「을사위훈」의 삭제문제가,

가) 당초 왕과 훈구 측의 찬동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림 측의 주장대로 을사사건을 전적으로 악으로만 평가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나) 훈작 후 장장 32년(명종 즉위년~선조 10년), 선조로 임금이 바뀌고서도 10년 만에야 삭훈이 결정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개삭(改削)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 오늘날 을사사건과 그 원훈(元勳)들이 악의 축(軸)으로 지목되어 있는 것은 오직 사림들의 끈질긴 인해전술의 결과라고 봅니다.

(5) 참고로 일각에서는 고종 1년(1864 갑자) 7.11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때에 공에 대해서도 공훈이 복구되었다는 설이 있으나『고종실록』,『승정원일기』「고종」편 등을 세밀히 확인하였으나 명백히 나타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pp007.jpg

임백령(林百齡)의 글씨 :『명가필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청송 성수침(成守琛)에 대한 답서: 충고에 대한 감사의 말과

밀감 4개를 보내니, 손자들에게 주라는 내용임

 

 

◇ 『한국사』의 기술내용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한국사』(2003.11.30)는「삭훈」의 문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한국사』는 필자의 실명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은 현대판「사관」이라 할 수 있는 사계의 권위자들로서 해당분야 전공학자들입니다.)

• 먼저「삭훈」논의가 제기된 배경으로, 신진사류가 선조의 즉위로 세력화하여 언론권을 장악하고 연이어 구신들과의 권력다툼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며 구신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데 두고 있습니다.

• 이러한 신진 사류는 드디어 선조 3년(1570) 4월 백인걸(白仁傑)의 신원상소를 효시로 삼사의 상소가 뒤따랐고 이이가 홍문관 교리가 된 5월 이후 삭훈 논의가 본격화되어, 그 결과 대다수의 피화인은 신원되었으나 유관, 유인숙 및 윤임과 계림군의 복관 그리고 삭훈 문제는 끝내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 그전에 이 위훈개삭 주장은 을사사화 자체를 무효화하는 의미를 지니므로 거기서부터 비롯된 권신체제 하에서 벼슬한 구신들의 처지나 명분이 무너짐은 말할 것도 없고, 사화를 역옥(逆獄)으로 인정하고 공신칭호까지 내려준 명종의 처분을 부정함으로써 명종의 후계자였던 선조의 명분까지 난처함에 빠트릴 일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을사신원과 삭훈 문제에 관하여는 사류들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고 사류내의 의견도 한결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이·정철·이해수 등 신진사류들은 사화자체를 역모사건이 아니라, 윤원형·이기 등이 공을 탐해 날조한 무옥(誣獄)으로 보아 완전한 신원과 삭훈론을 편 것입니다. ※ 을사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무옥이 아님은 앞에서 자세히 언급한 것을 보시지 않 았습니까!

• 그럼에도 신진사류의 종장(宗長)이라 할 이황이나 선배 격에 해당되는 허엽(許曄)은 윤임과 계림군 류(瑠)는 신원되기 어렵고 따라서 삭훈은 쉽지 않을 것이란 인식을 가졌으며 신진사류의 선도자 기대승도 삭훈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이견이 있고 난관과 반대가 예상되었지만 사류들로서는 이것이 사림적 명분을 바로잡는 일일 뿐 아니라 신진사류 자신의 정치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안정을 보장받는다는 현실적인 면에서 이를 밀어 붙였으나 삭훈 문제는 끝내 성취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 삭훈 논의를 거치면서 구신계의 정치적 입장이 약화되는데 이준경이 선조 4년 5월 영의정에서 사직하고 우의정 오겸과 우찬성 박충원은 탄핵으로 면직되고 신진사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던 이탁(李鐸)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정국의 주도권은 점차 신진사류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선조 5년과 6년 사이에는 인사파문이 거듭되다가 6년 9월 마침내 영의정에 이탁, 좌의정 박순, 우의정 노수신으로 의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청요직에 머물던 사류로서는 자기계열의 인물들로 자리를 채우게 됨으로서 비로소 국정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고 바야흐로 사림의 정치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 이렇게 정권을 확보한 사류들은 드디어 선조 10년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위독할 때 대비의 지원(至願)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선조가 결단을 내림으로서 삭훈 문제는 사림들의 의도대로 실현되게 된것입니다. (이상『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42~44쪽 참조-필자 : 정만조<鄭萬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