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希齋) 임백령공(林白齡)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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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끝으로 앞에서 빠진 첨가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字)와 호(號)에 관한 혼선입니다.

•  선생의 자(字)는「인순(仁順)」이며 또 다른 자(一字)가「괴마(槐馬)」입니다. 그리고 호(號)는「희재(希齋)」입니다.

• 그런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옛 문헌이 호를 괴마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1513년(중종 26)경 그려진「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선생 등 같이 사가독서한 12인의 선비가 그 계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국가유산청 보물)에만 자「인순」, 호「희재」로 되어 있습니다.

• 선생의 자와 호를 나타내고 있는 원전(原典)은 선산임씨최초족보『병술보』(1766영조42)에 실려 있는「희재공행장」입니다. 이는 해남인 윤의중(尹毅中)(형조판서역임, 고산 윤선도의 조부)이 1590년경 쓴 선생의 행장(行狀)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밝혀져 있기를“공의 휘(諱)는 백령(百齡)이요 자(字)는 인순((仁順) 호는 희재(希齋)이며 또 다른 자(一字)를 괴마(槐馬)라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1995년의『을해보』한문행장에는 호가 빠져있고 한글 번역 행장에는 호를“희재 또는 괴마”라고 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 자(字) - 이름을 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장가간 후에 부르기 위하여 짓는 이름에 준한 것.

※ 호(號) - 본명이나 자 대신에 부르는 이름

 

2) 시호(諡號)와 관련하여서 입니다.(필자 임용원)

시호는 임금이나 높은 벼슬을 지낸 분·유현 등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입니다.그런데, 공의 시호는『조선왕조실록』에「충헌(忠憲)」으로 나오고 우리 족보에서도 이를 따라 최초보 때부터「충헌」으로 써왔는데「을해보」(1995) 때 「문충(文忠)」으로 고쳐부르고 있습니다.

 

『왕조 실록』에서는 공의 시호에 대한 지침을 임금이 전교하거나, 논의·결정하는 내용의 기사가『명종실록』명종16년 (1561)5.20조, 17년 (1562)2.4조,『선조실록』선조2년(1569)윤 6.6조,『선조수정실록』선조4년(1571) 7.1조 각 기사에 나옵니다. 그 중 명종7년 2.4조, 선조2년 윤 6.6조 기사에 공의 시호를「충헌(忠憲)」으로 정하게 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두 기사는 각각 명종 때와 선조 때 이야기이지만 시호를 만든 응교 박순과 관련한 스토리가 같고, 특히 선조 때 기사가 임금과 기대승이 주고받는 이야기인데 기대승은 백령공의 사위 기응세의 당숙이 되고, 또한 선조실록 편찬의 최고책임자(영춘추관사 총재관)가 기자헌으로 백령공의 외손자입니다.

 

위와 같이, 공의 시호는『왕조실록』기사로 보나 실록기사와 관련한 인물들의 행적·인맥관계로 보나「충헌」이 맞다하겠습니다. 그런데,『을해보』가 공의 시호를「문충」으로 고친 이유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거의 모든 인물·역사사전이「문충」으로 칭하고 있음에 따른 것인데, 이는「문충」이 사전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고 사전의 권위도 인정받을 만한 근거가 되며, 더욱이 시호에「文」자가 들어감을 최상의 영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논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각종사전이「문충」이라 칭한 것은『연려실기술』(이긍익)이라는 역사서에서,『기재잡기』(박동량)기사를 인용 그렇게 칭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기재잡기』는 사찬문집이며 또한 기사내용에도 약간의 착오가 보이기도 하여『왕조실록』보다는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박동량의 형 박동열이 쓴「쌍취정기」에도「충헌」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공의 시호는『왕조실록』대로「충헌」으로 칭하고 필요시 각주로「문충」을 부기하면 좋을 듯합니다.

 

3) 임백령공을 위요한「꿈 이야기」입니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렇던 사관(史官)들 조차「해남비촌(海南鄙村) 사람이요 향리(鄕吏)의 외손이 정승반열까지 자수성가한」(『명종실록』원년 7월 19일 조「사왈」) 특출한 인물인 만큼 각종 꿈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행장」에 나오는 꿈 이야기

<제1화>

“어려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자(字)를 괴마(槐馬)라 하라’고 명(命)하므로 공이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사용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은 즉, 공이 웃으면서 말하되‘괴(槐)는 허성(虛星)의 정기(精氣)인데 내가 무오년에 태어났으니 그 별들의 정기가 나에게로 모아진 것 같다’고 하였다.”합니다.

<제2화>

“모부인(母夫人)(음성박씨)이 시집온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휘 우형)의 꿈에 신인(神人)이 금반(金盤)을 주면서 말하기를‘이번 부인은 틀림없이 5남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천(千)·만(萬)·억(億)·백(百)·구(九)령(齡)으로 불러라. 가문을 일으킬 자는 그중 넷째아들일 것이다. 이 금반으로서 보증하노라.’하였다” 합니다. 이 금반이야기와 관련하여 후손 임윤수 박사가 전해온 바에 따라 중요한 사실하나를 소개드리고자합니다.(임용원) 지난 2007.3.19 공의 유택을 괴산 칠성면 사은리로 옮기고자 고양 벽제면 관산리 묘소를 개토하니 여러 유품이 출토되었습니다. 그중 관심을 끈 유물이 다음 사진에서 보는 반합의 뚜껑입니다. 은제로 추정되나 이는 분명 부친 우형공이 꿈에 신인으로 부터 받았다는 그 금반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신인으로 부터 실제 받기라도 한 듯 이생에서 귀히 간직하셨을 금반을 저승으로까지 고이 간직하시라는 자손들의 갸륵한 정성이 우러나는 유품입니다. 천봉(遷奉)의 과정을 통하여 460여년 뒤 설화의 실체를 밝혀 보이신 그 신비함에 후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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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금반뚜껑〉

 

<제3화>

“모부인이 공을 낳은 후 자리에 드니 꿈에 하늘에서 붉은 실이 끊기지 않고 칭칭히 내려와 아기를 덮어주고 얼마 후 방안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제4화>

“공의 외숙 박붕(朴鵬)이 전주 통판(通判)이 된 후에도 따라가서 배웠는데 그 부인(외숙모)의 꿈에 흰룡(白龍)이 방안에 도사리고 있으므로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공이 병으로 누워있었다. 통판공이 이를 듣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월당공행장月堂公行狀」에 나오는 꿈 이야기

<제5화>

“백령공이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는데 아우 구령(九齡)공이 궁궐에서 북문 쪽으로 뛰쳐나와 시장 쪽으로 달려가는지라 백령공이 쫓아가서 바라보니 종루 앞에 이르러 갑자기 뇌성병력과 비바람이 크게 치며 용으로 변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니 백령공이 기이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박동량朴東亮의『기재잡기寄齋雜記』에 나오는 이야기

<제6화>

“공이 과거를 보려는데 그날 새벽꿈에 어떤 분(신인神人)이 와서‘너의 자(字)를「괴마(槐馬)」로 고쳐라’하고‘시관(試官)이 틀림없이「괴마」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하였다. 과장(科場)에 자리 잡자 과연 시관이‘그대의 자를 왜 괴마라 하였느냐’하고 물었다.(중략)한 시관이 말하되‘한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분부하기를 자를 괴마라고 하는 유생(儒生)이 있을 터인즉 그가 후일 당당히 재상이 될 사람이다.’하더라는 것이다.

(중략) 그 후 병오년에 우상(右相)으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중 요동에서 졸하였는데「괴(槐)」자는 삼공(三公)을 표상(表象)하고「마(馬)」자는「오(午)」를 뜻하니 곧 병오졸을 말함이라. 그 증험(證驗)함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기재잡기』의 이 에피소드는 고문헌인『대동기문(大東奇聞)』,『해동명인전』등에도 실려 있는데, 원래 위인(偉人)은 꿈과 연결되어 신비의 베일에 싸이게 마련인가 봅니다. 무오년에 나고, 우상(右相)이 되었으며, 병오년에 졸하니「괴마」공임을 스스로 증(證)하신 셈입니다.

 

박문수朴文秀와 이광좌李光佐의 대화

<제7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영조 때 판서, 우찬성)가 과거 전날 밤 신인(神人)의 꿈을 꾸고 과거를 보았는데 며칠 후 덕망 높은 이광좌(숙·영조 때 영의정-백사 이항복의 현손)대감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들으니 이번 과거에 신(神)의 시가 나왔다고 하더라.”

“누구라고 하옵니까?”

“아직 누구인줄을 모르지만 아주 훌륭한 시라고 하더라.”

박문수가 자신의 시를 말하는 것 같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신의 시를 지은 사람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재주가 비상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전의 괴마 임백령은 과거 전날 신이 시제를 가르쳐주어서 장원급제하였단다.”

“예! 괴마가 그랬습니까? 후세인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더군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파에서 하는 소리다. 괴마는 재주 있고 글 잘하였던 사람이란다.”

이 말에 박문수는 저으기 안심하였다. 그 후 박문수는 장원급제하여 출세의 길에 올랐다.(이 이야기는 이현희 저『알기 쉬운 우리나라 역사』하권-1987. 4. 25 대광서림 간 652쪽에서 인용함.) 괴마공은 꿈 이야기를 통하여 후대의 박문수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4) 해남의 남문 밖에 있는「홍교(虹橋) 이야기」입니다.

이 다리는 원래 무지개다리인 홍교(虹橋)였는데 그것은 임백령공의 입상(入相)(정승벼슬을 함)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230년 전(1781. 5 정조 5년)에 이 다리를 고치면서「남천교(南川橋)」로 개명하였는데(『해남읍지』참조) 그 이유는 당시 공이 관작의 추탈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후 1967년 5월에 현 다리로 개축하면서「홍교(虹橋)」로 명칭을 복원하였는데 해남군 향교 전(前) 전교(典校) 윤병진(尹炳珍)씨에 의하면 조선 고종 1년에 공의 삭작(削爵)이「사면복권」되었으므로 향교에서 논의하여 다시「홍교(虹橋)」로 복원개명 하였다고 합니다. (「해남홍교 유래기」참조)필자는 처숙(지방사학자, 고 시당 박장수 선생)으로 부터 이 사실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소재를 찾고 있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쯤 마침 관광차 해남에 들렀던 공의 후예 임철기(林哲基)씨가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역시 조상이 점지하신 것 아니냐고 감동하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때 목제로 허술했던 다리가 지금은「콘크리트 다리」로 바뀌고 이름만 그대로「홍교」로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홍교」는 해남을 빛내는「역사적 건축물」이므로 원래대로「석재 무지개형 다리」로 개조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덤으로 훌륭한「관광자원」의 역할이 뒤따르리라고 생각합니다.

 

5)「괴마(槐馬)」에 대한 글자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괴(槐)」는“홰나무”로서, 주(周)나라 때 조정의 뜰에 홰나무 3그루를 심어 삼공(三公-영·좌·우의정)의 좌석을 표시한데서 온 뜻이라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즉,「괴(槐)」자는 최고로 고귀한 자리(정승)를 뜻하며 다음과 같은 성어(成語)도 파생되고 있습니다.

- 괴신(槐宸) - 천자(天子)의 궁전

- 괴위(槐位) - 삼공의 지위

- 괴정(槐鼎) - 대신(大臣)의 지위(세발이 솥의 몸통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삼공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에 비교하여 이른 말)

- 괴추(槐秋) - 진사시(進士試)를 치를 때(음 7월 홰나무꽃이 누르스름 할 무렵에 시험을 치르므로 이르는 말)

 

「마(馬)」에 대하여

- 크고(大) 빨리 달린다(쾌주快走)(고대 군의 중추)

-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영물(靈物)이라는 것(신의 메신저)

- 사자(死者)의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인도자(영혼의 인도자)

이상과 같이「괴(槐)」·「마(馬)」모두 그 뜻이 최상급으로 상상을 초월한 고귀한 글자이며 그래서 노인(老人)(신인神人)이 백령공의 꿈에 이 고귀한 성어(成語)를 전수한 것으로 보여 지며, 실제로 괴마공이 무오(戊午)년에 태어나서 병오(丙午)년에 졸하시고(둘다 말의 해) 정승반열에 오르시니 괴마(槐馬)의 신몽(神夢)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6)「괴산(槐山)」도 마찬가지입니다.

홰나무 즉“정승들이 사는 곳”이므로 이곳에 괴마공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것은 조상의 섭리이며, 그곳에 공의 묘소가 좌정(座定)하신 것 또한 자연(신)의 섭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7)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선생의「행장」과 관련하여서입니다.

「행장」을 지은이는 해남 동향의 26년 후배인 윤의중(尹毅中)(1524 중종19~?)입니다. (그의 부 윤구의 외조부와 선생의 외조모가 남매간임) 명종 3년(154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때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선조 14년(1581) 4. 29 형조판서에 제수된 분입니다. 선조원년『명종실록』편찬 때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낸 분으로 선생의 훈작삭탈 전과정을 지근에서 지켜본 분입니다.

 

「행장」이 어떠한 계기와 목적에서 쓰여 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내용을 보면 앞부분에 선산임씨의 시조와 그 설화를 밝히고 이후 선생의 일생과 인품에 관하여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비교적 자세히 쓰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훈작삭탈을 연상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습니다. 이점에 유의하고 싶은 것입니다.

 

 

 

6. 끝으로 앞에서 빠진 첨가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字)와 호(號)에 관한 혼선입니다.

•  선생의 자(字)는「인순(仁順)」이며 또 다른 자(一字)가「괴마(槐馬)」입니다. 그리고 호(號)는「희재(希齋)」입니다.

• 그런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옛 문헌이 호를 괴마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1513년(중종 26)경 그려진「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선생 등 같이 사가독서한 12인의 선비가 그 계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국가유산청 보물)에만 자「인순」, 호「희재」로 되어 있습니다.

• 선생의 자와 호를 나타내고 있는 원전(原典)은 선산임씨최초족보『병술보』(1766영조42)에 실려 있는「희재공행장」입니다. 이는 해남인 윤의중(尹毅中)(형조판서역임, 고산 윤선도의 조부)이 1590년경 쓴 선생의 행장(行狀)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밝혀져 있기를“공의 휘(諱)는 백령(百齡)이요 자(字)는 인순((仁順) 호는 희재(希齋)이며 또 다른 자(一字)를 괴마(槐馬)라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1995년의『을해보』한문행장에는 호가 빠져있고 한글 번역 행장에는 호를“희재 또는 괴마”라고 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 자(字) - 이름을 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장가간 후에 부르기 위하여 짓는 이름에 준한 것.

※ 호(號) - 본명이나 자 대신에 부르는 이름

 

2) 시호(諡號)와 관련하여서 입니다.(필자 임용원)

시호는 임금이나 높은 벼슬을 지낸 분·유현 등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입니다.그런데, 공의 시호는『조선왕조실록』에「충헌(忠憲)」으로 나오고 우리 족보에서도 이를 따라 최초보 때부터「충헌」으로 써왔는데「을해보」(1995) 때 「문충(文忠)」으로 고쳐부르고 있습니다.

 

『왕조 실록』에서는 공의 시호에 대한 지침을 임금이 전교하거나, 논의·결정하는 내용의 기사가『명종실록』명종16년 (1561)5.20조, 17년 (1562)2.4조,『선조실록』선조2년(1569)윤 6.6조,『선조수정실록』선조4년(1571) 7.1조 각 기사에 나옵니다. 그 중 명종7년 2.4조, 선조2년 윤 6.6조 기사에 공의 시호를「충헌(忠憲)」으로 정하게 된 경위가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두 기사는 각각 명종 때와 선조 때 이야기이지만 시호를 만든 응교 박순과 관련한 스토리가 같고, 특히 선조 때 기사가 임금과 기대승이 주고받는 이야기인데 기대승은 백령공의 사위 기응세의 당숙이 되고, 또한 선조실록 편찬의 최고책임자(영춘추관사 총재관)가 기자헌으로 백령공의 외손자입니다.

 

위와 같이, 공의 시호는『왕조실록』기사로 보나 실록기사와 관련한 인물들의 행적·인맥관계로 보나「충헌」이 맞다하겠습니다. 그런데,『을해보』가 공의 시호를「문충」으로 고친 이유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거의 모든 인물·역사사전이「문충」으로 칭하고 있음에 따른 것인데, 이는「문충」이 사전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고 사전의 권위도 인정받을 만한 근거가 되며, 더욱이 시호에「文」자가 들어감을 최상의 영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논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각종사전이「문충」이라 칭한 것은『연려실기술』(이긍익)이라는 역사서에서,『기재잡기』(박동량)기사를 인용 그렇게 칭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기재잡기』는 사찬문집이며 또한 기사내용에도 약간의 착오가 보이기도 하여『왕조실록』보다는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박동량의 형 박동열이 쓴「쌍취정기」에도「충헌」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공의 시호는『왕조실록』대로「충헌」으로 칭하고 필요시 각주로「문충」을 부기하면 좋을 듯합니다.

 

3) 임백령공을 위요한「꿈 이야기」입니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렇던 사관(史官)들 조차「해남비촌(海南鄙村) 사람이요 향리(鄕吏)의 외손이 정승반열까지 자수성가한」(『명종실록』원년 7월 19일 조「사왈」) 특출한 인물인 만큼 각종 꿈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행장」에 나오는 꿈 이야기

<제1화>

“어려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자(字)를 괴마(槐馬)라 하라’고 명(命)하므로 공이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사용하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은 즉, 공이 웃으면서 말하되‘괴(槐)는 허성(虛星)의 정기(精氣)인데 내가 무오년에 태어났으니 그 별들의 정기가 나에게로 모아진 것 같다’고 하였다.”합니다.

<제2화>

“모부인(母夫人)(음성박씨)이 시집온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휘 우형)의 꿈에 신인(神人)이 금반(金盤)을 주면서 말하기를‘이번 부인은 틀림없이 5남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천(千)·만(萬)·억(億)·백(百)·구(九)령(齡)으로 불러라. 가문을 일으킬 자는 그중 넷째아들일 것이다. 이 금반으로서 보증하노라.’하였다” 합니다. 이 금반이야기와 관련하여 후손 임윤수 박사가 전해온 바에 따라 중요한 사실하나를 소개드리고자합니다.(임용원) 지난 2007.3.19 공의 유택을 괴산 칠성면 사은리로 옮기고자 고양 벽제면 관산리 묘소를 개토하니 여러 유품이 출토되었습니다. 그중 관심을 끈 유물이 다음 사진에서 보는 반합의 뚜껑입니다. 은제로 추정되나 이는 분명 부친 우형공이 꿈에 신인으로 부터 받았다는 그 금반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신인으로 부터 실제 받기라도 한 듯 이생에서 귀히 간직하셨을 금반을 저승으로까지 고이 간직하시라는 자손들의 갸륵한 정성이 우러나는 유품입니다. 천봉(遷奉)의 과정을 통하여 460여년 뒤 설화의 실체를 밝혀 보이신 그 신비함에 후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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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금반뚜껑〉

 

<제3화>

“모부인이 공을 낳은 후 자리에 드니 꿈에 하늘에서 붉은 실이 끊기지 않고 칭칭히 내려와 아기를 덮어주고 얼마 후 방안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제4화>

“공의 외숙 박붕(朴鵬)이 전주 통판(通判)이 된 후에도 따라가서 배웠는데 그 부인(외숙모)의 꿈에 흰룡(白龍)이 방안에 도사리고 있으므로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공이 병으로 누워있었다. 통판공이 이를 듣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월당공행장月堂公行狀」에 나오는 꿈 이야기

<제5화>

“백령공이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는데 아우 구령(九齡)공이 궁궐에서 북문 쪽으로 뛰쳐나와 시장 쪽으로 달려가는지라 백령공이 쫓아가서 바라보니 종루 앞에 이르러 갑자기 뇌성병력과 비바람이 크게 치며 용으로 변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니 백령공이 기이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박동량朴東亮의『기재잡기寄齋雜記』에 나오는 이야기

<제6화>

“공이 과거를 보려는데 그날 새벽꿈에 어떤 분(신인神人)이 와서‘너의 자(字)를「괴마(槐馬)」로 고쳐라’하고‘시관(試官)이 틀림없이「괴마」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하였다. 과장(科場)에 자리 잡자 과연 시관이‘그대의 자를 왜 괴마라 하였느냐’하고 물었다.(중략)한 시관이 말하되‘한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분부하기를 자를 괴마라고 하는 유생(儒生)이 있을 터인즉 그가 후일 당당히 재상이 될 사람이다.’하더라는 것이다.

(중략) 그 후 병오년에 우상(右相)으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중 요동에서 졸하였는데「괴(槐)」자는 삼공(三公)을 표상(表象)하고「마(馬)」자는「오(午)」를 뜻하니 곧 병오졸을 말함이라. 그 증험(證驗)함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기재잡기』의 이 에피소드는 고문헌인『대동기문(大東奇聞)』,『해동명인전』등에도 실려 있는데, 원래 위인(偉人)은 꿈과 연결되어 신비의 베일에 싸이게 마련인가 봅니다. 무오년에 나고, 우상(右相)이 되었으며, 병오년에 졸하니「괴마」공임을 스스로 증(證)하신 셈입니다.

 

박문수朴文秀와 이광좌李光佐의 대화

<제7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영조 때 판서, 우찬성)가 과거 전날 밤 신인(神人)의 꿈을 꾸고 과거를 보았는데 며칠 후 덕망 높은 이광좌(숙·영조 때 영의정-백사 이항복의 현손)대감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들으니 이번 과거에 신(神)의 시가 나왔다고 하더라.”

“누구라고 하옵니까?”

“아직 누구인줄을 모르지만 아주 훌륭한 시라고 하더라.”

박문수가 자신의 시를 말하는 것 같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신의 시를 지은 사람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재주가 비상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전의 괴마 임백령은 과거 전날 신이 시제를 가르쳐주어서 장원급제하였단다.”

“예! 괴마가 그랬습니까? 후세인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더군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파에서 하는 소리다. 괴마는 재주 있고 글 잘하였던 사람이란다.”

이 말에 박문수는 저으기 안심하였다. 그 후 박문수는 장원급제하여 출세의 길에 올랐다.(이 이야기는 이현희 저『알기 쉬운 우리나라 역사』하권-1987. 4. 25 대광서림 간 652쪽에서 인용함.) 괴마공은 꿈 이야기를 통하여 후대의 박문수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4) 해남의 남문 밖에 있는「홍교(虹橋) 이야기」입니다.

이 다리는 원래 무지개다리인 홍교(虹橋)였는데 그것은 임백령공의 입상(入相)(정승벼슬을 함)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230년 전(1781. 5 정조 5년)에 이 다리를 고치면서「남천교(南川橋)」로 개명하였는데(『해남읍지』참조) 그 이유는 당시 공이 관작의 추탈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후 1967년 5월에 현 다리로 개축하면서「홍교(虹橋)」로 명칭을 복원하였는데 해남군 향교 전(前) 전교(典校) 윤병진(尹炳珍)씨에 의하면 조선 고종 1년에 공의 삭작(削爵)이「사면복권」되었으므로 향교에서 논의하여 다시「홍교(虹橋)」로 복원개명 하였다고 합니다. (「해남홍교 유래기」참조)필자는 처숙(지방사학자, 고 시당 박장수 선생)으로 부터 이 사실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소재를 찾고 있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쯤 마침 관광차 해남에 들렀던 공의 후예 임철기(林哲基)씨가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역시 조상이 점지하신 것 아니냐고 감동하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때 목제로 허술했던 다리가 지금은「콘크리트 다리」로 바뀌고 이름만 그대로「홍교」로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홍교」는 해남을 빛내는「역사적 건축물」이므로 원래대로「석재 무지개형 다리」로 개조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덤으로 훌륭한「관광자원」의 역할이 뒤따르리라고 생각합니다.

 

5)「괴마(槐馬)」에 대한 글자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괴(槐)」는“홰나무”로서, 주(周)나라 때 조정의 뜰에 홰나무 3그루를 심어 삼공(三公-영·좌·우의정)의 좌석을 표시한데서 온 뜻이라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즉,「괴(槐)」자는 최고로 고귀한 자리(정승)를 뜻하며 다음과 같은 성어(成語)도 파생되고 있습니다.

- 괴신(槐宸) - 천자(天子)의 궁전

- 괴위(槐位) - 삼공의 지위

- 괴정(槐鼎) - 대신(大臣)의 지위(세발이 솥의 몸통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삼공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에 비교하여 이른 말)

- 괴추(槐秋) - 진사시(進士試)를 치를 때(음 7월 홰나무꽃이 누르스름 할 무렵에 시험을 치르므로 이르는 말)

 

「마(馬)」에 대하여

- 크고(大) 빨리 달린다(쾌주快走)(고대 군의 중추)

-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영물(靈物)이라는 것(신의 메신저)

- 사자(死者)의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인도자(영혼의 인도자)

이상과 같이「괴(槐)」·「마(馬)」모두 그 뜻이 최상급으로 상상을 초월한 고귀한 글자이며 그래서 노인(老人)(신인神人)이 백령공의 꿈에 이 고귀한 성어(成語)를 전수한 것으로 보여 지며, 실제로 괴마공이 무오(戊午)년에 태어나서 병오(丙午)년에 졸하시고(둘다 말의 해) 정승반열에 오르시니 괴마(槐馬)의 신몽(神夢)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6)「괴산(槐山)」도 마찬가지입니다.

홰나무 즉“정승들이 사는 곳”이므로 이곳에 괴마공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것은 조상의 섭리이며, 그곳에 공의 묘소가 좌정(座定)하신 것 또한 자연(신)의 섭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7)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선생의「행장」과 관련하여서입니다.

「행장」을 지은이는 해남 동향의 26년 후배인 윤의중(尹毅中)(1524 중종19~?)입니다. (그의 부 윤구의 외조부와 선생의 외조모가 남매간임) 명종 3년(154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때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선조 14년(1581) 4. 29 형조판서에 제수된 분입니다. 선조원년『명종실록』편찬 때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낸 분으로 선생의 훈작삭탈 전과정을 지근에서 지켜본 분입니다.

 

「행장」이 어떠한 계기와 목적에서 쓰여 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내용을 보면 앞부분에 선산임씨의 시조와 그 설화를 밝히고 이후 선생의 일생과 인품에 관하여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비교적 자세히 쓰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훈작삭탈을 연상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습니다. 이점에 유의하고 싶은 것입니다.